Silly

실용음악과 학생의 어느날의 일기

3,4,5,6월. 4개월의 한 학기 안에 연주해야 하는 실기는 공식적으로만 5개. 실기 하나를 한달 반 정도 준비해야 하니 두세개씩 겹쳐 연습하는 나날들이 흔하다. 짜잘한 실기는 몇 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많고, 그게 다가 아니라 공연 준비해야 하지, 연주 대타 뛰지, 알바로 해야 하는 연주도 있고… 그냥 바쁘고 힘들다. 내가 하는 내 일이지만 내가 나로서 있는 느낌이 아니다.


그런 따분함 속의 어느 날, 점심 공강 때 강의실에 앉아서 내 바로 뒤에 앉은 여자A와의, 대화를 가장한 재잘거림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기를 시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중이었다. 활짝 열린 문 밖으로, 손이 없는 교수님의 교재를 냉큼 대신 들어 지나가는 남자A를 발견했다. 연주하는 게 생긴 것만큼 순하고 깨끗하진 않지만. 원래 가던 방향 정 반대인 교수실로 거리낌 없이 지나가는 그 애를 보고 '착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남자A는 모든 사람들한테 친절하고 다정해."

라는 말을 시작으로 여자A는 시간이 오래 지나도 기억날 얘기를 내게 전했다. 강의실 불을 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맑고 밝은 빛이 열린 창문으로 바람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고, 그 바람은 목을 가볍게 간지럽힐 정도만큼만 머리카락을 흔들고, 누군가의 낙서와, 지워진 자국으로 남은 누군가의 낙서였던 흔적들로 때 탄 아이보리색 책상 위에 양 팔을 교차해서 얹은 채로, 더 이상 남자A가 보이지도 않는 문 바깥의 복도 풍경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처럼 눈을 창 밖으로 돌리고, 간지러운 바람을 미워하기라도 하는 것마냥, 잔뜩 화난 표정에, 더운 여름 날씨 때문은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그래서 오해하게 만들어."

그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냥 한 말이라고 했다.


다음 날 있는 실기 때문에 AM 06:00에 연습실을 갔는데 남자A가 있었다. 이유 없이 조금 놀랐다. 일찍 왔네, 오늘 실기 때문에, 이런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각자의 연습실로 들어갔다. 너의 연주는 무슨 생각을 담고 있니?라고, 묻고 싶은 새벽이었다.


그 날은 별이 반짝였으면 했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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