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y/reView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 영화를 10년 전 쯤에 봤다면 정말 촌스럽다고만 생각했겠지만 지금 봐서 신선하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복식이나 헤어스타일같은 게 매력적이었고 그 외의 부분에선 아련하고 따뜻하면서도 눅진한 느낌들을 받을 수 있었다. 붉은 벽돌집, 목재 인테리어, 해진 천막, 공중전화, 각진 자동차, 구권 지폐, 이젠 패션 브랜드로 더 익숙할 코닥까지… 물론 앞으로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낭만적인 감상만을 느낀 거겠지만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더라도 예전의 것들을 보면 떠오르는 이런 감정들은 충분히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함. 묘하게 배우들의 말투같은 것도 좀 예전 느낌(서울 사투리?)이 나서 재밌었음.

 

 

영화를 개봉 당시에 봤더라도 미묘하고 오묘한 연출로 따뜻한 느낌들을 쉽게 받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가령 울먹거리는 친구들의 단체사진 속 모습이나 옷차림이 바뀐 것으로 특정 상황의 전개를 암시하는 장면들이 굉장히 많다. 몹시몹시 감탄했고 너무 좋았다.

 

 

영화를 보면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의 숭고함과 낭만보다는 (최소한 극 중 남주의) 사랑의 본질은 이기적인 거구나 하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 생각해보면 사랑이 숭고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 애당초 사랑의 본질이 숭고함 같은 어떤 신성한 감정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ㅋㅋㅋ 결국 남주도 보통의 사람일 뿐이고 그런 아주 평범한 개인이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내게 되는 욕심과 후회, 포기 같은 것들을 아주 조금의 가치 부여를 하면서 담담하게 담아내려는 것 같아 결국은 좋았다는 이야기. 어떤 선택이든 결국 남주에게는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고… 욕심을 내고 이기적으로 군다는 게 뭔 죽일놈 취급하며 매도할만한 것도 아니고 결국 마지막엔 여주에게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게 됐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가 하는 나이브한 결론으로 이어짐. 말이 계속 길어지는데 한마디로 영화 속 주인공이라고 항상 옳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라는 거.

연인관계로서의 사랑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애정도, 다분히 표현을 어색해하는 전형적인 남성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근데 또 그건 나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사랑이 오히려 좋았고 감정적인 울림이 있어서 보면서 두세번 정도 운 듯. 본인이 죽을 병에 걸렸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살면서 어떤 종류로든 이별은 겪게 되는 것이고 그 때 느낄 수 있는 공통적인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도록 잘 연출한 것 같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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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란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소재 자체가 굉장히 진부하지만 영화가 뻔하지 않고 재밌고, 좋다라고 느낄 수 있었던 건 위에서 짚은 포인트들이 효과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잘 만든 영화.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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