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py

나름 명문대 합격했는데도.

 
 
우리반에서 내가 수능을 제일 잘봤댄다.
수시도 두 군데나 합격했다.
함께 1, 2등 다투던 아이들도 재수를 하거나, 수시땐 거들떠도 안보던 대학들에 정시원서를 넣는다.
 
애들이 다 부럽다고, 사이가 안좋던 애들까지 축하한다 정말 부럽다. 고 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냥, 그렇다. 내가 잘한건지도 잘 모르겠다.
 
캐나다에서 1년유학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검정고시보고 수능친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넌 나태해서 안된다며 고등학교 편입하라고 해서, 했다.
꿈때문에 1학년때 이과로 진학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넌 이과성향이 아니라서 가봤자 바닥만 깔아줄거라고 했지만 이과에 갔고, 첫시험에서 반 1등했다.
2학년 때, 의대에 가고싶다고 꿈을 말하니까, 아버지는 웃었다. '비'웃었다. 니가 가겠냐. 아...나는 못가는구나...
3학년 때, 겨울방학시작하고 죽도록 공부했다. 그 때 뭔가 느꼈다. 나도 하면 할 수 있을거 같다는 거. 정말 열심히했는데, 그때까지 넌 역시 문과성향이라는 얘기를 했다. 학기가 시작하고, 중간고사 반 1등을 하건 모의고사 전교 4등을 하건..그 때는 아무 말 없었다. 시험이 끝난 다음날인가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하는데 벼락같이 소리치면서 욕설을 퍼부으셨다. 미친 세끼. 저런 세끼를 공부 왜시키나. 고3 중반에 가선 엄마가 아빠에게 나에게 스트레스 좀 주지말라고 부탁했다. 아빠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아빠에게 투명인간이었다. 그래서 나도 아빠에게 인사도 안하고, 눈도 안마주치기 시작했다. 내가 패륜아지.
수능을 치고,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학교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성당에서 기도해주시느라 못오셨다. 양쪽손 엄마 아빠 손 잡고 가는 애들 천지다. 아빠한테 달려가서 뽀뽀하는 애도 있었다. 나처럼 혼자 집가는 애는 아무도 없네. 버스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수능 체점했는데, 꽤 잘봤다. 엄마는 울면서 축하한다, 고맙다고 해주셨다. 엄마는..
결국 어디가면 '우와' 소리듣는 대학교 공대에 두군데나 합격했다. 이과성향이 아니라는 내가, 둘 다 수리논술로 합격이다.
엄마의 부추김에 이어진 '축하한다'는 작은 소리를 들었을 때 역시나. 싶었지만, 회사동료들한테 자랑했다며? 나한테 직접 말해준건 아니지만 우연히 엄마와 카톡한 거 보고, 정말 정말 너무 기뻤다. 합격소식 알았을때보다 더 기뻤다. 드디어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잠시. 인제 '쟤 공대성향아니다. 공대가봤자, 학점도 제대로 못받을게 뻔하다.'
아직까지 아버지랑 나는 서로에게 투명인간이다.
 
뭐가 어쨌든...아빠 돈으로 잘먹고 잘컸다. 어린 나이에 유학까지 갔다왔다.
나 너무 배은망덕한거 아닌가?
하지만 아빠.
고1 겨울방학때, 나 정신과에서 우울증 진단받았잖아. 꽤 오래된거같대. 엄마가 아빠한테 말하지 말자고 해서 안했어. 그치만 맨날 보란듯이 약 먹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매일 먹는 약. 왜 뭐냐고 안물어봐? 카드긁으면 나오는 XX의원, 우리 집 앞에 있는 정신과인데. 아빠가 자주 가는 목욕탕 건물에 있어서, 조금만 관심있다면 무슨 병원인지 알았을텐데. 결국 나중에 내가 울면서 말했잖아. 근데 그때 입을 다물더니, 여지껏 그거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있잖아.
EBS에서 애정결핍때문에 자기엄마한테 병적으로 집착하는 애가 나왔었지. 식구들 모두 욕하면서 봤던거 같다. 내가 그래도 저애 심정도 이해는 간다. 불쌍하네. 라고 했을 때, 개그라도 들은듯이 웃었잖아? 그때 입술꽉깨물고 방으로 들어와서 숨죽여서 펑펑 울었어.
오늘도 동생이, 먹고 흘린 쓰레기며 뭐며 다줍고 치웠어. 거실이고 부엌이고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 하고 설거지까지 다했어. 여행갔다오면 엄마 피곤할거같아서.. 말끔한 집 보면서 뿌듯해하는데 동생자식이 식탁을 또 다 어질러놓네? 니가 쳐먹은건 좀 치우라고 화를 냈더니 투덜투덜 거리면서 치우더라. 그래서 방문꽝닫고 들어가서 욕 한건 참았지.
엄마가 고맙다고 해서 기뻤어. 동생이 너무 어질러놔서 치우느라 힘들었다고 말했어. 엄마도 동생한테 이제 니가 어지른건 좀 치우라고 잔소리를 하셨더니 문꽝닫고 또 들어가버리대. 근데 아빠, 제발 애한테 좀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
엄마한테 하는 소리가 아닌 거 같았어.
그리고 동생한테 물었어. 저녁 먹었냐. 뭐 시켜먹을까?
하루이틀이 아닌데 왜 이렇게 새삼스레 속상해하는 내 자신도 이해가 안간다.
 
그거 알아? 아빠가 싫은만큼, 동생도 싫어.
집안일 하나 안 도우려고 하고, 5만원짜리 티셔츠 18만원짜리 운동화 아무렇지도 않게 긁으면서 맨날 옷없다고 카드달라고 떼쓰고 안주면 험악한 표정으로 집안 분위기 어둡게하고, 맨날 허세나 부리고 앉았고. 정말 싫어. 좋아하려고 무진 노력했는데 진짜 도저히 힘들어.
엄마한테 카톡보냈더라. 걔는 그냥 일체 신경을 쓰지마. 동생이나 신경써서 키워.
아빠. 그래서 나도 인제 더이상 아빠한테 바라지 않을게. 근데 아빠 돈은 필요하거든? 그냥 아빠가 주는 돈에 고마워할게. 나 그냥 패륜아할래.
아빠. 동생 잘 키워. 전과목을 학원다니면서도 그런 성적표 가져오는 애, 일주일에 반은 놀다가 새벽 3시에 들어오는 애, 잘 키워..
잘 키워서 그 애 덕보고 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