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연옥과 림보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악인도 성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사후에 가는 장소라는 공통적 속성 탓에 림보의 한자식 표기가 연옥이라는 둥의 이음동의어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앨범 감상의 이해에 도움이 될 정도로만 구분하자면, 그 기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 죄를 씻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필연적으로 가게되는 곳이 연옥이고,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모든 것이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고통은 없지만 그렇다고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구원이 있는 것도 아닌 곳이 림보=고성소다.
음울한 비트가 배경이 되어,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허수아비]의 여배우 앨런 페니(Allan Penney)의 대사가 뒤이어질 이야기를 예고하는 전경이 되어 흐른다(Dead, It‘s dead. You sent it into limbo. That soul cannot go to heaven.). 저마다 다양한 것에 각자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가장 쉽고, 또 크게 마음의 상처와 긴 공허를 안겨다주는 것‘이라는 가치를 갖고 있다는 데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1번 트랙 {연옥문}에서 2번 {고성소}로 넘어가는 과정은 앞서 주지했던 연옥과 고성소(림보)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해하고 듣는다면 심상의 변화를 훌륭한 비유를 통해 잘 표현해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래가 힘들고 외로운 정서를 갖는 상태이지만, 연인의 존재 자체 혹은 그녀와 함께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결실(예컨대 결혼 같은)을 구원으로 여기며 그 과정에 있는 자신을 연옥에 있는 것으로 비유했고 이어지는 고성소는 그런 구원의 가능성을 상실한, 이별을 겪는 과정의 자신을 연옥에서 고성소로 향하는 모습으로 빗댄다. 그리고 {고성소}를 통해 그것이 갖는 허무, 우울, 외로움 등의 정서는 배가되어 마지막 곡의 재생이 마무리되는 순간까지도 앨범 전체에 덧입혀진 채 벗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얼핏 들으면 앨범의 타이틀인 [연옥]이나 {고성소}의 속성을 내포하지 않는 듯한 곡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성소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끝까지 따르리}는 고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샘플링한 비트고 가사의 내용마저 유재하 트리뷰트(Tribute)를 표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그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희망}은 실제 노도가 기르는 개의 이름에서 따온 제목의 곡으로 유기견이었던 희망이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곡인데 이 곡에선 굳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전주에서 직접적으로 ‘세상의 모든 상처받고 버림받은 동물들과 그런 동물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는 분들께...‘라고 나레이션을 하거나 훅의 ‘다시 혼자가 될까봐 혹시 너 두려운거니?‘같은 부분에서 쉽게 외로움과 연결되는 키워드가 되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역시 실제 3일간 꼼짝 않고 잠만 잤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늦잠}의 경우, 잠은 일시적인 죽음이며, 죽음은 영원한 잠이란 말이 있듯 ‘잠‘이 ‘죽음‘과 연결되는 키워드로의 역할을 한다. 노도도 가사 안에서 직접적인 표현으로 둘을 동일시하고 있다(오늘만 나 죽어 있어보고 싶어/ 내가 가끔 늦잠을 자도 살기 위해 잠시 죽는 거니 좀 봐줘). 사족이지만 장시간의 수면은 우울증의 한 증세이기도 하다.
{늦잠}의 마지막 벌스 중, ‘날 좀 안아주자 적어도 나에겐 버림받지 말아보자‘라는 직접적 언급을 통해 소강되었던 분위기는 환기됨과 동시에 다시 고조된다. 이전의 곡들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지금까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허나 하나의 주제를 얘기하더라도 단순한 키워드의 나열이나 단조의 비트로 하는 간접적인 암시는 직접적으로 얘기함보다 못하다. 앨범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의 본체인 {고성소}는, {고성소 Aromatic Haze Remix}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고조된 분위기를 최대로 끌어올린다. 노도의 전작 [The Rose]에서 처음 쓰였던 이름인 Aromatic Haze는 그가 몽롱한 느낌을 내는 비트를 쓸 때 사용하는 이름으로, 비트를 제외한 가사의 내용이나 구성이 달라지진 않았으나 재탕의 느낌은 받을 수 없다. {연옥문}에서 {고성소}로 이어지는 구성과, 통상의 리믹스 트랙이 보너스 트랙 취급을 받으며 앨범의 최후방에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고성소 Remix가 괜히 {Bunker}, {잿빛 아래} 앞에서 단순한 리믹스 역할만 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건 자명하다.
Outro라 할 수 있는 {Bunker}와 {잿빛 아래}는 자연스레 고조된 분위기를 곧바로지만 거부감 없이 소강시키는 배역이다. 각종 비유들을 비롯 완곡한 표현의 가사가 채워져 있고, 여유있는 템포의 비트는 Aromatic Haze의 느낌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연옥]을 한 편의 영화에 비유한다면 {Bunker}가 마지막 장면, {잿빛 아래}는 검은 화면에 음울한 비트에 느릿하게 흰 글씨들이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연옥]은 실화에 기초한 한 편의 영화다.
‘영화‘라는 콘셉트에 자신을 담아내긴 했지만 영화도 장르가 있듯, 실제 본인과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 사이에 어느 정도는 거리가 있는 앨범(예를 든다면 Verbal Jint의 [누명])들과는 달리(엄밀히 따지자면 어떤 얘기든 남에게 전달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픽션이 되지만) 인간 노태희와 뮤지션 노도는 [연옥] 안에서 온전히 붙어 있다. {고성소}는 2007년 겪은 이별을 기초로, {끝까지 따르리}는 곡을 만드는 과정과 유재하에 대한 존경심을 얘기하고(그의 왼팔엔 1987년 발매된 초판 LP 표지의 글씨체로 ‘사랑하기 때문에‘가 문신되어있다), {희망}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곡 제목부터가 자신이 기르는 개의 이름이다. 진부한 자기자랑보다 스스로를 낮추면서도 결코 허황되지 않은 포부를 드러내는 {지켜봐}, 앞서 설명한 {늦잠} 등 모두가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신중하게 이야기하는 곡들이다. 그 신중함은 배치한 효과음 하나하나에도 고스란히 배여 있어, 앨런 페니의 대사와 비명소리까지 노도를 100% 대변하는 듯 하다. 하나 더 주목해야할 공통점은 곡 중에서 등장하는 화자가 노도 본인 한명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쳐링이 없는 것은 물론 곡 안에서 노도가 다른 화자로 분해 노도에게 말하는 부분도 없다. 이는 역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장치로써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물론 이 앨범이 완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감정적 접근이나 음악 외적 연출은 훌륭하지만 그래서 음악적 기법의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비교적 세련된 느낌의 {고성소 Aromatic Haze Remix}도 자칫 들으면 ‘촌티‘ 혹은 ‘융통성 없음‘으로 다가올 수 있을 정도로 비트의 운용이 단조롭다. 그의 커리어를 봤을 때 분명 진보했지만 무리해서 긴 호흡의 랩을 한 뒤 분할녹음으로 바로 이어나간다거나, 쉽게 예상 가능한 라이밍 등 2% 부족한 느낌이 드는 랩 역시 감상에 방해요소가 될 수 있음에 충분하다. 음악은 음악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당연한 명제를 노도는 명심해야 한다. 특유의 스타일로 굳어지다시피한 그 음악적 색이 매력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론 많이 아쉽다.
클래식이라고까지 말하긴 어렵지만 [연옥]은 노도의 음악 커리어에서나 2012년 현재 한국 힙합의 연대에서도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 노도라는 뮤지션에 대해 다시 제고해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앨범이다. 하나의 큰 흐름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얘기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내지만 결코 그 큰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유기성, [사랑하기 때문에]의 감성을 노도만의 음악적 방식으로 해석해 잘 어우러지게 만드는 기술. 비슷한 주제와 콘셉트의 앨범과 뮤지션이 범람하는 시장에 오랜 경력이 무색하지 않게 신선하면서도 원숙함을 성공적으로 반영해 내놓은 이 앨범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처음 듣자마자 확 꽂히는 곡이 있다. 노도의 이번 앨범이 결코 이에 해당한다곤 할 순 없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새로 느낄 수 있는 음식의 맛처럼 들을때마다 그만의 음악적 매력과 앨범을 완성하기 위한 치열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연옥]은 틀림없는 수작이다.
평점 : 8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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