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째서 성노동을 노동으로 바라볼 수 없을까? 일차적으로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낭만적 사랑의 개념에 심각하게 위배되기 때문이다. 가정이란 신성한 것이어야 하며 사랑은 순수한 것으로 남아야 한다. 그건 우리가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무언가다. 왜냐하면 가정을 통치하는 테크놀로지가 결국 국가를 통치하는 테크놀로지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수신제가어쩌고를 말하진 않겠고, 가정과 국가에 대한 지배의 모델을 두고 그리이스부터 시작되는 계보학적 접근도 하지 않겠다. 트위터에서라면 그건 거의 자명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모델은 결혼을 여자의 교환으로 보았는데, 우린 이를 두고 남성중심적이라 비난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그 사회적 '구조'가 '친족구조'에 의해 규명되고 있음을 살펴야 한다. 그렇다. 레비스트로스에겐 누가 누구의 새끼인지 분명한 게 문명과 비문명의 문턱 사이에 놓인 것이다. 문명과 비문명을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연구가 '인류'의 기본 단위를 '친족'에서 찾을 정도로 '친족'의 문제는 (역사적 형태의) 지배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니까 누구와도 섹스를 할 수 있고, 사실 그런 육체적 관계는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 라고 한다면 우리는 결혼과 같은 제도를 지탱할 수 없다.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다. 결혼 관계 이외의 파트너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건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관계는 '진정한' 사랑의 증거로 제시되며, 사랑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한편 성노동의 거래관계에는 그러한 환상의 차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쨌건 사랑이라는 환상과 성노동의 인정이란 문제는 한번 다시 생각해보고 싶군. 정신이 맑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