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py

작가의 독창성

작가의 독창성과 해석적 자유의 문제

한 텍스트가 이제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텍스트의 그물 안의 어떤 지점에 존재하고 있을 뿐 아무 새로운 것도 없다고 한다면 작가라는 존재가 텍스트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저자를 생각하지 않고 텍스트만을 읽는 방법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작가가 작품을 완성한 순간 그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 하나의 텍스트로만 존재하게 된다면, 작가를 기준으로 작품들을 분류하는 방법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된다. 즉, 이러한 방법을 극단까지 밀고 간다면, 지금에 와서 작가란 「저작권자」이상의 의미는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작가도 기존에 존재하는 텍스트들의 그물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고, 그것은 커다란 하나의 도서관과도 같아서 한 텍스트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서관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석」에는 무한한 자유가 부과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 에코는 「해석에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극단적으로 지나친 해석에 대해서도 고려해야만 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이「적어도 주어진 어떤 해석은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가지의 경우가 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는 『머큐리, 혹은 저 은밀하고 재빠른 메신저 Mercury; Or, the Secret and Swift Messenger』(1641)의 서두에서 존 윌킨스가 들려준 한 인디언 노예와 무화과에 대한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화과와 무화과의 숫자를 명시한 편지 한 통」이라는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가 만일 편지를 보낸 저자인 인디언 노예의 주인과 그 주인의 의도(무화과를 친구에게 전해주려는 의도)와 구체적 정황에서 분리되어 공중에서 표류하게 된다면, 잠재적으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할까. 이 텍스트를 접한 독자가 내리는 해석의 가능성은 상당히 자유로운 것으로 보인다. 독자는 「사물이나 그 상징을 모호하게 변화시켜 버린 상실된 요인들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고(무화과를 보낸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는 야릇한 풍자를 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익명의 편지로부터 출발해서 다양한 의미들과 지시 대상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해석이란 무엇인가, p.59)」. 그러나 독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는 반드시 존재하는데, 이 경우에는 편지가 먼 옛날 언젠가(편지가 쓰여진 시점)에는 분명 무화과가 가득 든 바구니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에코는 「해석되어야 할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해석은 어딘가에서 틀림없이 발견되는,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존중되는 무엇인가에 관해서 언급해야만 한다(해석이란 무엇인가, p.60)」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독자는 텍스트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 자유를 지니고 있지만, 해석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텍스트의 의지」를 존중해야만 한다. 이 경우 어떤 텍스트를 그 의도를 초월해서 해석하는 경우에 틀린 해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텍스트를 쓴 작가의 의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앞에 가정한 것처럼 모든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들을 이어나간 그물들 위 한 점에 위치하므로 작가의 독창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작가를 완전히 텍스트의 해석에서 배제시킨다면, 그것은 어색할 수 있다. 만약 한 텍스트의 작가가 오래 전에 사망한 것이 아닌, 해석을 내리는 학자들과 동시대의 인물로 생존하고 있는 경우, 그가 특정 해석에 대해 자신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힌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해 에코는 여러 예들을 들고 있지만, 그 중 자신이 『푸코의 진자』를 썼을 때 일어났던 일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가 처음 『푸코의 진자』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 그는 많은 사람들이 「미셸 푸코」라는 이름을 떠올릴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그 점에 대해서 별반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제목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전형적 독자가 미셸과 그런 피상적 관련을 짓지 않았으면 하고」바랬지만, 「많은 유식한 독자들이 그렇게 하는 바람에」실망하였다. (유식한 독자는 아니지만, 나 역시 미셸 푸코와 『푸코의 진자』의 관련성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텍스트가 작가를 떠나 존재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순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상황을 제어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 작가는 고작해야 유감을 표명하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더구나 에코에게 직접 그 해석을 말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전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경우까지는 그러한 유감조차 표시할 수 없다. 혹은 작가는 창작 과정에서 독자가 자신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는 경우를 방지하고자 장치를 넣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에코는 『푸코의 진자』에서 까소봉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엘리엇이 쓴『미들마치』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헤르메스 문서』가 날조된 것임을 입증했던 이삭 까소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로 책 속에 그런 대화를 넣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어떤 유식한 독자가 나타나 엘리엇과 까소봉의 관련성을 찾아내자, 에코는 「독자만큼 유식하지 못한 경험적 작가가 불쌍할 뿐」이라는 말로 푸념한다.) 이처럼 작가는 이미 텍스트가 자신의 손을 떠났을 때, 독자가 그 텍스트에 대해 텍스트의 그물망에서 어떠한 관련성을 찾아내든 관여할 수 없다. 작가는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해석에 대해 어떠한 권위를 행사할 수 없으며,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텍스트의 의지」 자체이다.

여기서 작가의 의미를 찾아내어 보자면, 작가의 증언이 적어도 「텍스트의 창작 과정」에 대한 이해해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 텍스트의 결말이 어떤 형식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나 무의식의 결과가 아니다. 이 때의 증언들은 작가의「사생활에 관련될 뿐, 텍스트의 흐름에서 찾아지는 것들도 아니고 해석의 문제와 관계되는 것들도 아니」지만, 「어떻게 하나의 텍스트가 적어도 처음에는 문학과는 관련이 없는 잠재적 영역으로 부터 생겨날 수 있는가(해석이란 무엇인가, p.114)」를 이야기 해 주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텍스트는 없고 작가의 독창성이 완벽하게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해석은 「텍스트의 의지」를 받아들인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 때 작가는 텍스트가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가지각색으로 읽혀지는 상황에서도 그 작품의 창작 과정을 말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움베르토 에코 외, 『해석이란 무엇인가』(열린책들,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