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음의 검치 선정 코멘트가 적절하지는 않았다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주제가 '선정 평'이니만큼 앨범을 오독한 청자들에게 가하는 울분에 가까운 비판 대신 이 앨범이 왜 상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설득', 또는 최소한 그렇게 판단한 '이유'를 적었어야지. '앨범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느끼는 고까운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한대음 선정이라는 권위 위에서 그런 담론을 제기할 만큼 억울이 컸나? 하는 의문도 들고. 굳이 어퍼컷 어쩌고 안 했어도 최우수 모던록 음반 선정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부정과 충격으로 다가왔을 텐데. 뭐 굳이 언급함으로써 더 극단으로 치닫는 파급을 의도했다면 충분히 성공했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오지은씨의 지적은 타당하다. 플레이어가 평단을 거부/부정하는 것의 본질이 그냥 땡깡 부리는 것(특히 힙합 플레이어들이 주체가 되었을 때)이라는 담론을 몇 번 본 적 있고 동의하지만 이번 건에 한해서는 마냥 땡깡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애초에 음악 체계 외의 이야기를 시작한 건 김성대씨이기 때문.
물론 선정 평으로써의 내용이 적절하지 않았을 뿐이지, 다른 걸 차치하고 그 코멘트가 '검정치마의 가사 속 서사만을 근거로 한 작품의 저평가'에 대한 반론이라는 전제로만 봤을 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 우선 체계이론의 개념을 끌어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회라는 큰 체계(시스템)는 그를 이루는 여러 내부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 경제, 법 등이 그 예이며 이들은 그 체계 자체를 구성함과 동시에 다른 체계와 자신을 구별하는 기준점이 되는 매체가 있다. 따라서 내부 체계는 그를 유지하기 위한 폐쇄성과 내부생산성을 기본 전제로 한다.
하지만 한 체계에서 다른 한 체계로의 소통(비판)은 무척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독립된 체계라고 해도, 결국 사회라는 더 거대한 시스템 안에 결속된 내부 체계일 뿐이고 따라서 체계간의 어쩔 수 없는 의존성이란 것 역시 있기 때문이다. 가령 법이라는 체계는 그 자체로는 독립적이지만 그를 구성하는 입법은 정치라는 다른 체계를 통해 영향을 받는다. 힙합의 미소지니적 문화가 페미니즘 담론을 주체로 지적되고 플레이어들이 자성의 피드백을 보이는 것 역시 체계간의 의존성을 보여주는 한 예다. 이게 체계이론의 개략적인 내용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체계간의 의존성만을 생각하고 체계 자체의 독립성과 폐쇄성을 존중하지 않거나 무시하려는 비판에 대한 것이다. 프로작은 이를 폭력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이를 몰이해적 폭력이라고 구체적으로 짚어 말하고 싶다.
풀어 쓰자면, <Thirsty>의 가사들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성혐오적이라고 비춰질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있다. 그게 페미니즘 담론 안에서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음악적으로도 가치가 없다는 결론으로 도달하는 것은 분명히 폭력이다. 음악이라는 '체계'의 매체는 가사 하나가 아니다. 음악은 그 체계 자체를 구성함과 동시에 다른 체계(ex. 문학)와 자신을 구별하는 기준점이 되는 매체가 있고 그 기본이 되는 매체는 리듬, 멜로디, 하모니다. 그리고 이 매체는 음악의 세부 장르로 들어갈수록 더 복잡하고 세밀해진다. 한대음 선정 평에서도 언급된 앨범의 모티브와 표상, 맥락 같은 것들 역시 <Thirsty>를 구성하는 매체들이다.
이를 무시하고 가사로만 음악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음악과 일반 문학은 별개가 아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잖아? 그렇기 때문에 체계와 그를 구성하는 매체를 몰랐든, 외면했든 존중 없는 몰이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봤다. 그리고 몰이해를 기반으로 한 해석이나 평가란 성립 자체가 될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프로작 트위터의 일련의 대화에서 아쉬웠던 다른 것들 역시 이런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들이었다. 가령 창작자와 작품 내 화자의 동일시를 당연히 한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좀 충격적이었음….
아, 앞서 '여성혐오적이라고 비춰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애매모호하게 말한 건 사실 그렇게만 해석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였는데 글 쓴 김에 이유도 적고 끝내야겠다. <Thirsty>는 검정치마 3집 3부작의 2번째 작품이고 전작 <Team Baby>가 담고 있는 내용과 앨범 커버 기타 등등 말하기 귀찮은 작품의 맥락을 바탕으로 해석해보면 검치가 <Thirsty>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일반보편적으로 사랑이라 불리기 어려운, 하지만 반드시 사랑의 범주에 속하는 모습과 감정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존재하고, 앨범이 담고 있는 것들 중 무엇인가를 누군가는 분명 개인 또는 보편적으로 경험했을 감정들이지만 그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외면하고 무시하려 하는 것들을 굳이 불편하게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음악적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검치가 그런 것들에 대해 긍정/부정 또는 옳다/그르다라는 결론을 내리려고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보편적으로 부정적이고 금지되고 금기시되는 모습을 미디어에 담아낸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도가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원래 의도라고 결론짓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한다는 점. 검치가 <Thirsty>와 관련된 담론에 말 한 마디 얹지 않았던 것도 그가 그런 싸움 자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말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이런 사랑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