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크게 열어 말한다. 잠깐 앉아도 되나요?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요.) 교복을 입는 게 지독히도 싫었던 나이, 동화책 밖에서도 동물을 보고 싶다며 칭얼거리는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놀러갔던 적이 있어요. 싸늘하지만 조금 걸으면 교복 쟈켙 안이 약간 덥다 느껴지는 그런 날씨였던 것도 기억나요. 학교를 일찍 마친 날, 집에서 동생을 데리고 나와선 바로 지하철 타고 갔죠. 한 손엔 아무렇게나 구긴 쟈켙을, 나머지 한 손엔 동생의 손을 잡고 그렇게 불편하게 걸으면서 모눈종이 속 그림처럼 철창 안에 머무르고 있는 동물들을 구경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어요. 구경보단 자꾸만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올릴 손이 없는 것이나, 실수로 손을 놓아서 동생을 잃어버리거나 넘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계속 신경 쓰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라섹 했어요. 안경 안 쓴 게 더 잘 어울린다고들 하더라구요. 그녀는 말이 없다) 그렇게 걷는데, 누가 봐도 사육사처럼 보이는 베이지색 사파리 패션의 여자가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는 거예요.
궁금해 하는 동생을 데리고 가 봤더니, 동물원에서 종종 하는 이벤트인지 새끼 곰이 목줄에 매인 채 겅중대며 돌아다니고 있고, 제 키의 반도 안 되는 아이들이 그 주변에서 곰을 껴안으려 하거나, 쓰다듬고 있더라구요. 가까이 가서 가만히 구경하는 와중에 사육사가 제게도 곰을 안아보라고, 들어 올려 건네주기에 얼떨결에 안아보게 됐는데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렸을 때 갖고 놀던 곰인형 같은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었어요. 뻣뻣하고 아무렇게나 뻗쳐 따갑기까지 한 털과, 흰자라고는 없이 검고, 크고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하며, 무게도 만만치가 않았고.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세상에 새끼 곰을 품에 안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에 신기한 게 더 컸어요.
유리창 너머로 그 쪽을 처음 봤을 때, 정말 뜬금없이 곰인형 생각을 했어요. 저 손을 잡아보고 싶다. 따뜻하고 귀여운 느낌의 저 사람을 그냥 안아보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제가 말을 걸었을 때, 그리고 대답하지 않는 그 쪽을 보며 당황해 하는 저를 보고, 오히려 그 쪽이 더 당황했겠죠. 정말 미안해요. 한시라도 빨리 말을 걸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단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녀는 말이 없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앞에 곰 얘기를 꺼냈던 건 유리창 안의 그 쪽이 밖에서 지켜보고 했던 상상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에요. 철창 너머로만 보던 곰을 처음 바라보고, 안아봤던 그 때의 감정과 다르지 않았어요. 마냥 신기하다거나 하는 그 때의 유치한 감정이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연신 껌벅이고 쫑긋거리는 눈과 귀, 뜨겁게 내쉬던 숨,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따뜻한 체온. 그것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편지처럼 전해주던,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 그 쪽은 곰 인형이 아니라 새끼 곰이었어요.
만약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그런 표정을 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너무 멀리 간 생각이라고도 역시 느끼지 않아요. 저도 순간 내 부모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그런 걱정을 했거든요. 이런 얘기가 선심 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의도는 아니에요. 저는 누구에게 선심을 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거나 착한 사람은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부모님이 우리를 비난할 수도 있다는 게 그쪽과 나 사이에 어떤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목소리가 없어도 괜찮아요. 내가 그 쪽을 보고 있잖아요.
그쪽이 좋아요.
그 쪽은 어떻게 생각해요?
평소 그가 선호하는 구석 쪽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포근하지만 작은 긴장이 은은히 맴도는 노란 조명빛의 카페 테이블, 남자는 여자에게 보여주던 빼곡이 글씨가 적힌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갈색 머리에 언뜻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왼쪽 귀에 걸린 보청기도 잘 어울리는 액세서리 같다, 는 생각도 조금 하면서. 여자는 머뭇거리다 아무도 볼 수 없게 살짝 미소 짓고는, 우아하게 가슴께로 올린 손을, 4분의 4박자를 지휘하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손짓의 속도는 안단테, 심장의 리듬은 비바체.
그녀는 말이 없다.
없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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