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사업체와 궁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많다. 그러나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궁정에서 생활했던 명민한 귀족들의 글을 읽어보면 근대의 사업체에서 생존하는 비결을 터득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은퇴한 뒤 자신들의 생각을 신랄한 경구 스타일로 정리해두었는데, 이런 냉소적인 글들은 우리가 남들에 대하여 믿고 싶어 하는 것들을 계속 흔들어댄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 구이차르디니(Guicciardini, 1483~1540),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 1613~1680), 라브뤼예르(La Bruyère, 1645~1696)가 쓴 글들은 노동자들이 출세를 하려고 할 때 공식적인 정규적 역할 외에 어떤 책략을 구사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동료를 조심해야 한다
"사람은 거짓되고, 음험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신의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될 일이 없을 것이다." (구이차르디니)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 (라브뤼예르)
·거짓말을 하고 과장해야 한다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라로슈푸코)
"중요한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는 감추고 성공은 과장하라. 이것은 속임수이지만, 사실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당신 운명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늘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다." (구이차르디니)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 (라브뤼예르)
·무서워야 한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의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마키아벨리)
"다수는 착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므로, 친절보다는 엄격함에 의지해야 한다." (구이차르디니) (P123)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미아 윤리학Etica Eudemia>>(기원전 350년경)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中道)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이성의 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철학적인 접근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경멸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특별한 악의 없이 경멸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염세적 태도의 출발점이며, 철학사에서는 이런 태도를 뒷받침해주는 예를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 염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P150)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사자에게 묻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아니라 관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수치감에 싸여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여자라는 것일까/피부색이 검다는 것일까/돈이 없다는 것일까]?"하고 묻는 대신 "나를 비난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틀렸거나, 부당하거나, 비논리적인 것이 아닐까?"하고 묻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무죄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관점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제도, 관념, 법은 어리석고 편파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P260)
예수는 동료애를 장려하기 위해 어린 아이를 보듯이 어른을 보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아이로 그려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도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향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공감과 너그러움을 쉽게 표현하게 된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은 나쁘다고 하기보다는 짓궂다고 하고, 오만하다고 하기보다는 건방지다고 하지 않는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 사람을 미워하기는 어렵다. 눈을 감고 얼굴 근육을 이완시킨 채 무방비 상태에서 자고 있는 사람은 돌보아주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다. 그래서 기차나 비행기에서 우리 옆에 자고 있는 사람을 오래 바라보면 왠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어떤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이 때문에 일상적인 공동체 관계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문명화된 무관심에 의문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주장에 따르면 낯선 사람이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와 같은 요구와 약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낯설다는 인상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인간적인 깨달음이다. (P306)
부자 되라는 말이 온 국민이 주고받는 덕담처럼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가난한 부모면 자식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자신의 무능과 악습을 반성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급기야 서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점과 미덕을 알아주고 존중하던 사람들까지도 눈에 보이는 부의 증표들을 환영할 뿐 아니라 스스로 과시까지 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 (P358, '옮기고 나서' 중) - 알랭 드 보통 / 불안
좋은 입문서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루며 앞으로 나아갑니다(이를 거꾸로 하면 변변치 못한 입문서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겠지요. 초보자가 모두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 전문가라면 누구나 말하는 것을 알기 쉽게 고쳐 써서 끝내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입문서와는 다르지요). 좋은 입문서는 먼저 첫머리에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모르는 것일까요? 왜 이제까지 그것을 모른 채 지내왔을까요? 게을러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모르고 있는 이유는 대개 한 가지뿐입니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거짓말 같나요? 부모가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순간 갑자기 눈을 딴 곳으로 돌리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아이들은 부모가 '돌봐주기 모드'에서 '설교 모드'로 바뀌는 순간을 확실히 알아차리고 곧바로 귀를 닫습니다. 그게 선생님이거나 다른 어른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설교를 듣지 않기 위해 설교의 징후가 있는지 없는지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노력이 아닐 수 없지요. 아이가 부주의하고 태만해서 어쩌다가 부모의 설교를 진지하게 끝까지 들어주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어떤 것을 모른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른 채로 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가?'라는 물음을 정확하게 인지하면 우리가 '거기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재능을 가진 아이나 신동들은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가정환경 속에서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천재는 그보다 나쁜 가정환경에서 자라는 이상한 경향이 있다. (P175)
권위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질서 있게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이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를 '정당성의 원칙'이라고 하며, 정당성은 세 가지 원칙에 바탕을 둔다. 우선, 권위를 따르도록 요청받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발언권이 있다는 생각, 다시 말해 그들이 목소리를 내면 상대는 들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둘째, 법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내일의 규칙이 오늘의 규칙과 대략 같은 것이라는 합리적인 예측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 권위는 공정해야 한다. 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차별 대우해서는 안 된다. - 말콤 글래드웰 / 다윗과 골리앗
우리는 인터넷 쇼핑몰의 로그인 비밀번호를 선정할 때는 알파벳과 아라비아 숫자의 복잡한 조합으로 개인 정보를 철저히 보호하면서, 제 3자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다룰 때에는 "이건 비밀인데"라는 뻔한 두 단어의 조합으로 비밀 유출의 모든 리스크를 차단했다고 착각 혹은 자만하곤 한다.
그 결과, 종종 "비밀인데"라고 말을 뱉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은 '비밀'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단지 서두가 "비밀인데"로 시작하는 입소문이 되곤 한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 대해 꿰뚫고 있으며,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속이려 들면 안 되며,
그래서 우리는
남으로부터 자유로워져도 된다. - 김은주 / 1cm+
·동료를 조심해야 한다
"사람은 거짓되고, 음험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신의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될 일이 없을 것이다." (구이차르디니)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 (라브뤼예르)
·거짓말을 하고 과장해야 한다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라로슈푸코)
"중요한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는 감추고 성공은 과장하라. 이것은 속임수이지만, 사실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당신 운명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늘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다." (구이차르디니)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망한 것이다." (라브뤼예르)
·무서워야 한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의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마키아벨리)
"다수는 착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므로, 친절보다는 엄격함에 의지해야 한다." (구이차르디니) (P123)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미아 윤리학Etica Eudemia>>(기원전 350년경)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中道)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이성의 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 | 철학적 이상 | + |
겁 | 용기 | 무모함 |
인색함 | 관대함 | 낭비 |
줏대없음 | 온화함 | 격분 |
촌스러움 | 재치 | 익살 |
무뚝뚝함 | 친근함 | 아부 |
철학적인 접근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경멸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특별한 악의 없이 경멸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염세적 태도의 출발점이며, 철학사에서는 이런 태도를 뒷받침해주는 예를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 염세주의의 중요한 모범을 보여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P150)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사자에게 묻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아니라 관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수치감에 싸여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여자라는 것일까/피부색이 검다는 것일까/돈이 없다는 것일까]?"하고 묻는 대신 "나를 비난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틀렸거나, 부당하거나, 비논리적인 것이 아닐까?"하고 묻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무죄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관점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제도, 관념, 법은 어리석고 편파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P260)
예수는 동료애를 장려하기 위해 어린 아이를 보듯이 어른을 보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아이로 그려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도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향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공감과 너그러움을 쉽게 표현하게 된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은 나쁘다고 하기보다는 짓궂다고 하고, 오만하다고 하기보다는 건방지다고 하지 않는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 사람을 미워하기는 어렵다. 눈을 감고 얼굴 근육을 이완시킨 채 무방비 상태에서 자고 있는 사람은 돌보아주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다. 그래서 기차나 비행기에서 우리 옆에 자고 있는 사람을 오래 바라보면 왠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어떤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이 때문에 일상적인 공동체 관계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문명화된 무관심에 의문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주장에 따르면 낯선 사람이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와 같은 요구와 약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낯설다는 인상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인간적인 깨달음이다. (P306)
부자 되라는 말이 온 국민이 주고받는 덕담처럼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가난한 부모면 자식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자신의 무능과 악습을 반성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급기야 서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점과 미덕을 알아주고 존중하던 사람들까지도 눈에 보이는 부의 증표들을 환영할 뿐 아니라 스스로 과시까지 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 (P358, '옮기고 나서' 중) - 알랭 드 보통 / 불안
좋은 입문서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루며 앞으로 나아갑니다(이를 거꾸로 하면 변변치 못한 입문서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겠지요. 초보자가 모두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 전문가라면 누구나 말하는 것을 알기 쉽게 고쳐 써서 끝내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입문서와는 다르지요). 좋은 입문서는 먼저 첫머리에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모르는 것일까요? 왜 이제까지 그것을 모른 채 지내왔을까요? 게을러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모르고 있는 이유는 대개 한 가지뿐입니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거짓말 같나요? 부모가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순간 갑자기 눈을 딴 곳으로 돌리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아이들은 부모가 '돌봐주기 모드'에서 '설교 모드'로 바뀌는 순간을 확실히 알아차리고 곧바로 귀를 닫습니다. 그게 선생님이거나 다른 어른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설교를 듣지 않기 위해 설교의 징후가 있는지 없는지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노력이 아닐 수 없지요. 아이가 부주의하고 태만해서 어쩌다가 부모의 설교를 진지하게 끝까지 들어주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어떤 것을 모른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른 채로 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가?'라는 물음을 정확하게 인지하면 우리가 '거기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재능을 가진 아이나 신동들은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가정환경 속에서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천재는 그보다 나쁜 가정환경에서 자라는 이상한 경향이 있다. (P175)
권위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질서 있게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이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를 '정당성의 원칙'이라고 하며, 정당성은 세 가지 원칙에 바탕을 둔다. 우선, 권위를 따르도록 요청받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발언권이 있다는 생각, 다시 말해 그들이 목소리를 내면 상대는 들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둘째, 법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내일의 규칙이 오늘의 규칙과 대략 같은 것이라는 합리적인 예측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 권위는 공정해야 한다. 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차별 대우해서는 안 된다. - 말콤 글래드웰 / 다윗과 골리앗
우리는 인터넷 쇼핑몰의 로그인 비밀번호를 선정할 때는 알파벳과 아라비아 숫자의 복잡한 조합으로 개인 정보를 철저히 보호하면서, 제 3자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다룰 때에는 "이건 비밀인데"라는 뻔한 두 단어의 조합으로 비밀 유출의 모든 리스크를 차단했다고 착각 혹은 자만하곤 한다.
그 결과, 종종 "비밀인데"라고 말을 뱉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은 '비밀'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단지 서두가 "비밀인데"로 시작하는 입소문이 되곤 한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 대해 꿰뚫고 있으며,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속이려 들면 안 되며,
그래서 우리는
남으로부터 자유로워져도 된다. - 김은주 / 1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