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py

내가 좋아하는 시들 (스압)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 즐거운 편지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기형도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 - 푸른 밤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 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최승자 -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나희덕 - 천장호에서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허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게절이 옮겨 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 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 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김용택 - 사랑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오오 패롯[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정지용 - 카페 프란스







나는 들짐승이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을 본 적이 없다 
얼어 죽은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때 
그 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슬퍼해 본 적도 없었으리라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D.H.Lawrence - Self Pity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 흔들리며 피는 꽃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고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신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우리의 옛 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 귀천(歸天)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허수경 - 불취불귀(不醉不歸)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이용악 - 그리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위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 가난한 사랑 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호승 - 수선화에게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박인환 - 얼굴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 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함성호 - 낙화유수







모두 다 떠돌이 세상살이
살면서 살면서
가장 외로운 날엔 누구를 만나야 할까
 
살아갈수록 서툴기만 한 세상살이
맨몸, 맨손, 맨발로 버틴 삶이 서러워
괜스레 눈물이 나고 고달파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모두 다 제멋에 취해
우정이니 사랑이니 멋진 포장을 해도
때로는 서로의 필요 때문에
만나고 헤어지는 우리들
텅 빈 가슴에 생채기가
찢어지도록 아프다
 
만나면 하고픈 이야기 많은데
생각하면 더 눈물만 나는 세상
가슴을 열고 욕심없이 사심없이
같이 웃고 같이 울어줄 누가 있을까
 
인파속을 헤치며 슬픔에 젖은 몸으로
홀로 낄낄대며 웃어도 보고
꺼이꺼이 울며 생각도 해 보았지만
 
살면서 살면서 가장 외로운 날엔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다
 
용혜원 - 가장 외로운 날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 빈 집







그립다
말을 할가
하니 그리워
 
그냥 갈가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 - 가는 길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앞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란이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문정희 - 한계령을 위한 연가







흩어지는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기형도 - 10월







   오늘 저녁 이 좁다른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쓸쓸한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무더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 흰 바람벽이 있어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간단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사일구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 - 사랑의 변주곡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연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밑에 깔아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가진 것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은 것 내 꿈이오니.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W. B. Yeats -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







그는 초췌했다 
-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 
팔리는 딸애와 
팔고 있는 모성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땅바닥만 내려보던 이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제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 
당신 딸이 아니라 
모성애를 산다며 
한 군인이 백 원을 쥐어주자 
그 돈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 원으로 
밀가루빵 사 들고 어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장진성 -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奇蹟 아녀

황지우 - 발작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도종환 - 그대 잘 가라







---MENU---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 프란츠 카프카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 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 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백창우 - 소주 한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 - 사막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에 수록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돌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소월 시 문학상' 당선 당시 고쳐지기 전 시
 
황지우 - 뼈아픈 후회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괘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끔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역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며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 눈물은 왜 짠가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 선운사에서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장석남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痛症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도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 - 편지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황인숙 - 꿈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 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내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十五越溪女 열다섯 아리따운 아가씨
羞人無語別 남이 부끄러워 말 못하고 헤어졌고야
歸來掩重門 돌아와 중문을 닫고서는
泣向梨花月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임제(林悌) - 무어별(無語別)







가끔은 생각이 나서
가끔 그 말이 듣고도 싶다
 
어려서 아프거나
어려서 담장 바깥의 일들로 데이기라도 한 날이면
들었던 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이거나 누이들이기도 했다
누운 채로 생각이 스며 자꾸 허리가 휜다는 사실을 들킨 밤에도
얼른 자, 얼른 자
 
그 바람에 더 잠 못 이루는 밤에도
좁은 별들이 내 눈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얼른 자, 얼른 자
 
그 밤, 가끔은 호수가 사라지기도 하였다
터져 펄럭이던 살들을 꿰맨 것인지
금이 갈 것처럼 팽팽한 하늘이기도 하였다
 
섬광이거나 무릇 근심이거나
떨어지면 받칠 접시를 옆에 두고
지금은 헛되이 눕기도 한다
새 한 마리처럼 새 한 마리처럼 이런 환청이 내려앉기도 한다
 
자고 일어나면 개벽을 할 거야
 
개벽한다는 말이 혀처럼 귀를 핥으니
더 잠들 수 없는 밤
조금 울기 위해 잠시만 전깃불을 끄기도 한다

이병률 - 새 날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김남조 - 설일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 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 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들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 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라.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이상 - 이런시







봄날 오후에 할 일도 없는데
자목련이 흐드러져요
그러고보니 당신에게서
꽃 한 송이 받은 적 없네요
아 구체적으로 서러워
내 마음
확인도 안 하고 떠나셨죠
봄날 숨 막히는 오후에
퍼플의 물감을 헤프게 쓰는
자목련이 흐드러져요
꼭 당신이 준 것인 양
한 아름 눈에 들어와
매우 정확히 현실적으로 서운해
구체적으로 서러워
눈물이 나버려

성기완 - 자목련 블루스







눈사람 한 사람이 찾아왔었다
눈은 그치고 보름달은 환히 떠올랐는데
눈사람 한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며 자꾸 나를 불렀다
나는 마당에 불을 켜고 맨발로 달려나가 대문을 열었다
부끄러운 듯 양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눈사람 한 사람이
편지 한 장을 내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새도록 어디에서 걸어온 것일까
천안 삼거리에서 걸어온 것일까
편지 겉봉을 뜯자 달빛이 나보다 먼저 편지를 읽는다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정호승 -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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