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함정"은 매우 위험하다. 그 긍정이 갈등이나 아픔 등을 덮고, 무언가 좋음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목표"가 되었을 때에 위험하다.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고, 충분히 선을 긋는 것이 우선인데, 선긋는 것이 나쁜 것으로 무언으로 합의된 관계들에서 자주 발생하는 이 긍정의 함정.
의외로 한 사람이 불편함을 말하지 못한 채 지나가면, 다른 이들도 쉽게 함구하게 된다. 그 불편함(negative)을 그저 긍정적인 말, 표현, 제스처(positive)로 대체하면 채워질 것 같겠지만, 이 때는 불편함-긍정성은 같은 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불편함은 계속 깊어지고, 이른바 긍정성은 왠지 쭉정이 상태로 높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는 새로운 커뮤니티에서 불과 몇 번의 만남만에 발생한다. 2시간짜리 교육의 5번만남이라거나. 하는 식에서도 말이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이상한 문장은, 사실 사회 곳곳에, 그리고 개인의 삶 곳곳에 깊숙이 자리한다. 이것들을 꺼낼 수 있을 때, 그 꺼냄을 보장하는 게 첫걸음. 그러나 첫 걸음 뒤에는 가시밭길도 있다. 의외로 다들 꺼내라고 하면, 쏟아내기 일쑤이기 때문인데. 중재자들의 역할이 크고 무겁다.
"선긋기"가 나쁜 것으로 인식되거나, 담쌓는다고 서운해하는 경우들을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선긋기야 말로 시작점이다. 어떤 선을 왜, 언제, 어떻게 긋는지에 대한 관계의 합의가 시작되는 영역이니까. 그런데, 이 선긋기에 대한 수동공격이나, 대놓고 나쁘다고 말하는 경우들이 관계에선 오히려 마이너스다. 선긋기에 대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게 필요하다. 그도 그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도 나의 감정으로 서운함이 있을 것. 이 사이를 같이 교섭하는 것이 서로가 더 깊게, 오래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요청받지 못하고, 말해지지 않은, 불편함"(unasked & untold discomfort)이 들어있는 관계. 그 불편함이 언제 어떤 때에 왜 있는지에 대한 물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꺼내질 수 있는 환경, 용기를 구축해야할 때다. 이것이 바로 중재자(매니저, 리더, 매개자) 등의 역할이며, 이것을 같이 버텨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에게 이 역할을 맡겨주기를. 그러나 이 힘 또한 한계가 있으니 care for carer 역시 신경을 써주기를.
이 불편함들을 꺼내서 다루지 못하면, 관계들은 결국 그 불편함 앞에서 좌초한다. 시작점이 되어야 할 지점이 결국 종착점이 되고 만다. 마치 100분토론 처럼.
불편함을 처음으로 꺼낸 사람을 악마화하거나, 그의 메시지를 무의식적+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행동들이 가해지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충분히 다루려면, 최초의 그 용기에 응답하기(respond)+팔로워1명 더. 이것은 이른바 3의 법칙과도 연관된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불편함 혹은 개선을 위한 메시지가 원투. 원앤투. 에서 끝난다면, 세번째 호응자가 없다면, 아마도 개선이나 변화는 어렵지 않나 싶다.
이 위까지의 글은 아무래도 나~타인(팀, 커뮤니티, 조직 까지도)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 그러나 비슷하게 나~나 사이. 내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나의 불편함'을 인지하는 것 또한 비슷하다. 나의 불편함을 내가 무시하는 것이 실제로 외부 세계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확장되기 쉽다. 내 안의 불편함(감), discomfort inside myself. 이 불편감을 보는 즉시 불편하다, 불편감이니까. 그렇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이는 내 자아들 실제로 역할이 나눠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한 이야기이다. 나는 나를 관찰할 수 있다. 이른바 관찰적 자아. observing ego. 메타인지 작동의 순간.
불편함을 느끼는 자아가 존재하고, 그 불편함을 바라보는 것 또한 가능하단 이야기다. 내 불편함을 관찰 및 인지하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해야, 밖으로 꺼내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내 불편함을 꺼내는 사람이 다시금 중요해진다. 메타인지가 되는 사람이니까.
더욱 중요한 것은 나의 불편함을 제대로 발견, 관찰, 인지, 인식, 표현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이 불편함을 전가하지 않는다.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천명한다. 평가절하 당하지도 않고, 남탓으로 돌리지도 않는다. 현실과 느낌(감정)을 구별해 낸다.
->심리학에서 아예 싸우지 않는 관계가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
다른 두 세계가 만나면 충돌은 불가피한데, 여기에서 엎치락 뒤치락의 논쟁은 대등한 관계다. 외려 위계가 있을때 억압된 평화, 가장된 평화가 출현하기 쉽다. “남녀 싸우지말고 사이좋게 지내요”의 불합리함이 여기에 있고, 성서의 예수가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평화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싸움과 갈등말하기는 좀 다를 수 있을 듯.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갈등을 말하고 다루는 방법이다. '동등함'이 당연히 시작점이다. 동등하다는 것은 당위로써 기계적으로 껀바이껀 항상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평균적으로 동등한 것이 좋다 생각함. 어차피 사람은 모두 능력치와 취향, 의욕 등이 모두 다르니까. 한편, 동등함을 오독조차 못하는 "서열매김"은 사실 파국으로 가는 지름길. 이 사회는 다양한 관계(결혼, 회사 조직, 심지어 너 몇살이야가 나오는 모든!)가 부서져 나가는 것은 그 반증일 것.
반대로 동등함을 오독한 다른 버전이 '약자 의자 차지하기'가 있다. 서열매김에서 강자되기의 뒷면인데, 이 둘은 쌍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동등하자고 얘기하는데, 한쪽이 약자이기를 고집하면, 이 또한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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