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py

asdx123

베스트간 청양고추 글, 마지막 부분 짤렸다는 부분 댓글에 써져 있던데, 그것까지 읽어보면 갑자기 왜 라면에 청양고추 잘라먹는지가 이해되네요. 그거 못봤을땐 식사마다 고추 챙겨먹는다는게 뜬금없는 장난같이 느껴지지만, 보고나니 그때일 후회하고 친구에게 미안해하는 마음 느껴져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반면에 이 글쓴이는 뭔가요. 농담한 친구 반죽여놨다는데서 황당했습니다. 글쓴이가 그 트랜스젠더를 진짜로 보통 여자애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반응했겠습니까? 그냥 취향아닌 여자애한테 잘해주는 거 보고 살림차릴거냐고 드립친 친구 줘패는게 정상적입니까? 명백한 과민반응에서 엿보이는 건 트랜스젠더친구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배려하고 있다는 자기자신에 대한 만족에 가깝습니다. 글쓴이가 친구 팬 사정, 그 여자분이 들었으면 기분 어떻겠습니까? 괴물로 배척하는 사람들이나, 유리잔 다루듯이 과하게 배려하려 애쓰는 사람들, 양쪽 모두 당사자에게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가 마음은 고맙지만 어쨌건 보통사람으로 여겨지지 못하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하니까. 그 여자친구, 글쓴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할거고 글쓴이의 그런 과한 배려의식 필요한 사람 아닐 겁니다. 돈까지 빌려줬다는 걸 보니 힘이 되고 싶은 진심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선의라도 정작 당사자에게는 상처가 되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배려하되 배려하고 있는 사실 자체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어떤지 점검해보는게 좋겠습니다.









위 만화에서 용사가 한 말의 배경에는, 연쇄살인범이 설치는 상황에서 순혈엘프와 하프엘프 집단 사이의 정파적 대립이 얽혀 수사에 혼선을 빚는 저간의 사정이 놓여있습니다. 백부장의 말은 상황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그 자체로는 옳지만, 백부장과는 다르게 각 집단은 그 옳은 명분을 핑계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살인범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살인으로 빚어진 혼란 속에서 그들의 이해를 만족시키기 위해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피해자를 위해 살인범을 잡으려는 사람은 저 에피소드에서 백부장과 용사밖에 없습니다. 백부장이 상황파악 못하고 다른 놈들 주워섬기는 명분 그대로 읊어댈 때, 용사는 얼마나 울화통이 치밀었을까요. 심지어 용사와 백부장은 파견나온 사람들이고, 정작 같은 마을의 피해주민을 위로하고 범인을 잡아야 할 자경단이 얼간이 짓을 반복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살인범은 미친놈이라 살인을 멈추지 않을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구요.


법철학자 라드브루흐는 법의 이념으로 정의, 합목적성, 법적 안정성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법적으로 판단하고 법력을 통해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법관은 공평무사한 판결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유사한 사안에 선례와 일관성 없는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악법조차도 정당한 절차를 통해 개선해야지 무조건 거부해야만 하는 것은 안 된다는 점이 법적 질서의 수호를 표현하는 법적 안정성의 이념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의라는 이념은, 로마법에서 연유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이라는 관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살인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딱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하며, 그 책임을 형량하는 것은 살인자가 피해자에게 가한 행위 자체에 대한 고려 뿐 아니라, 피해자가 가해행위에 대해 느껴야 했던 고통에 대한 고려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원칙은 오늘날에 와서도 법철학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자기 가족이 당해봐야 알지.' 라는 언명 또한 언제나 법적 질서를 무시하는 파탄지경으로 귀결되는 이기주의의 소산인 것만은 아닙니다. 공적인 이성에 의거하여 범죄를 사법부가 독점적으로 관장하고자 하는 근대 서구 형법이론이 도입되어 보편화 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한 독점적 권한을 사법부에 부여하기로 한 근본 취지를 상기해야 합니다. 피해자의 사력구제가 범죄행위에 대한 응보를 넘어서는 실책을 범하여 피해자의 구제행위가 또다른 범죄로 되는 것을 가급적 방지하고자 함일 뿐이지, 그렇듯 응보를 바라는 감정적 기초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한 취지는 아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공적 이성은 무엇으로 구성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역사성을 지니고, 지역성을 지닙니다. 공적 이성에 의한 형량 역시 과도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위험이 개인에 맡겨질 때보다 덜할 뿐입니다. 요컨대, 공적 이성이 사전적인 의미에서 중립적인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공적 이성 역시 응보의 감정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 이상 그 담지자인 판관이 판결에 임할 때 범죄자에 대한 감정적 기초 없이 판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해자의 감정을 강조하고 있는 용사의 발언을 시대에 뒤떨어진 미개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완전히 쓸모 없는 것으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당위명제는 그 자체로는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것이 적용되고 있는 구체적인 맥락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자칫 형식적이고 공허한 외침에 그칠 우려가 있습니다. 만화의 맥락 상 용사의 말은 음미할 가치가 있습니다.


"네 가족이 당해봐야 알지."라는 말을 굉장히 곧이곧대로 해석하시는 군요. 니가 피해자의 고통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나, 니가 당해보지 않아서나 제 3자 입장에서 당사자만큼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님의 두 가지 말이 이 맥락에서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 잘 알지 못하겠군요. 이 맥락에서 용사의 언명은 살인범 잡는 그 자체에 집중한다기보다 지들 밥그릇싸움에 한창인 수비대장이나 다른 놈들에게 문제의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수사기관은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수사에 임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판관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가정해도 억울하지 않은 판결을 내리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님이 올바르게 문제제기 하고 있듯이,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정당한 법적 절차아래 내려진 공정한 판결에 대해서도 자의적으로 설정한 기준에 의거 법적 질서를 부당하게 모욕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의 자의적인 기준은 자신의 무분별한 감정이겠죠. 대표적으로 "네 딸이 당해봐야.." 따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이 맥락과 용사가 처한 맥락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이 지점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법적 안정성의 이념이 아니며 오히려 정의의 이념이 등한시 되고 있습니다.


사이후사님의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첫 째, 사이후사님의 첫 댓글에는 이 작품이 답답하고, 용사의 말이 틀렸다고 하는 작품에 대한 평가가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드러난 표현으로는 그렇게 읽힙니다. 둘 째로, 저는 만화 속 상황에서 용사가 한 말의 정당성을 옹호한 것이지만, 그 정당성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만화 속 상황에 대한 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규범영역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다는 점,  이러한 상황이야 사실상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문제될 수 있는 사례라는 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네 딸이 당해봐야 알지." 따위의 언명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사용되고 있는지에 따라 님이 우려하는 상황인지 아니면 용사의 경우와 같이 지지부진한 상황의 핵심을 관통하는 상황인지 전혀 다르게 결론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말이 정당한 가치를 갖는 상황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에서, 오직 자신의 사심에 근거하여 또다른 범죄를 양산할 수 있는 위험을 과도하게 안고 있는 경우만이 현실 속의 문제라고 전제하고 있는 사이후사님의 주장은 이미 보편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는 지속적으로 보편으로서의 법이념과, 그것들이 적용될 구체적 맥락을 동시에 고려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자를 등한시 하면 상황논리에 매몰되고, 후자를 백안시하면 형식적인 정당성만이 남아 비열한 이전투구를 가려주게 됩니다. 더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상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앞서의 논의들을 차근차근 읽어보면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곡해를 하는군요. 판단의 근거 또한 자의적입니다. "내가 당해보거나 피해자와 공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자기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거든요. 그 둘은 엄연히 다른 이슈들입니다." 사이후사님의 이 말은 그 자체로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 둘은 다른 이슈입니다. 그러나 그 둘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또다른 논거를 통해 정당화해야 할 주장입니다. 용사는 그들이 자기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에만 관심이 있는 상황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말로 찌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 밥그릇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공적인 권한을 부여받은 수사기관으로서 피해자의 심정을 십 분 고려하여 최우선적으로 살인범 검거에 힘써야 하는 의무를 태만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사는 수사기관인 수비대장이 자기 가족이 그렇게 당했을 때처럼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 밥그릇에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입니다. 전사가 아니라 정치인(여기서는 협잡꾼이겠죠.)만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이고, 님이 세분해서 나눈 두 개의 이슈는 얼마든지 연결되서 말할 수 있습니다. 애매하게 섞는다는 말은 당혹스럽군요. 사이후사님은 반복해서 어떤 명제가 그것이 실제로 적용되는 맥락에 따라 해석의 범위가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님이 "니가 당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라는 말을 통해 주장하는 바 역시 이미 특정한 발화맥락을 묵시적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니가 당해보지도 않았으면서"는 반드시 님이 우려하는 식의 맥락에서만 쓰일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입니까? 나는 더 이상의 논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후로는 댓글을 달지 않겠습니다.


사견이지만, 아스란 영웅전은 영웅의 이야기로서는 배트맨을 넘어서있습니다. 영웅이란 개념 자체에 내재하는 비극적 운명과, 정의는 순수한 이념의 세계에서 조금의 애매모호함도 없는 명석판명한 궁극기준이지만, 현실에서 그 지침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반듯하게 선과 악을 가름할 수 없다는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주제는 작품 내내 일관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마지막에 가서 완전하게 통합됩니다. 놀라운 작품입니다.


진짜 마지막입니다. 이렇듯 답답한 경우는 또 오랜만이군요. 나는 사이후사님을 모욕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부탁을 드리죠. 논리학에서 보편과 특수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어떤 명제의 대전제는 그것의 소전제에 대해서는 보다 보편적이지만 다른 명제에 대해서는 특수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이미 보편입니다. 왜냐하면 보편적 법이념과 상황적 맥락을 동시에 고려해야한다는 주장이 어느 한 둘의 특수하고 구체적 사건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이념의 앞에 왜 보편적이라는 수식이 붙습니까? 법이념은 그것이 적용될 구체적 상황적 맥락에 비하여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보편적 법이념과 그것이 적용될 상황적 맥락의 상호고려' 라는 주장 또한 상당히 보편적인 주장이며, 님이 주장하는 바에 비하여 특수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이후사님의 댓글에서 "네가 당해봐야" 라는 말의 의미는 항상 특정한 발화맥락(님이 우려하는 상황)을 전제했을 때만 가능한 의미로밖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면 표현이 정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사이후사님을 모욕하려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한 번 더 찬찬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이미 한 번 식언을 했으니 이번에야말로 더 이상 댓글 달지 않겠습니다.

'Screep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 엄마가 연을 끊자네요  (1) 2012.11.29
  (0) 2012.11.24
그냥 누가 내 얘기좀 들어줘...  (1) 2012.11.06
엄마 카톡 프로필에...  (0) 2012.11.02
하아... 삼류 코미디프로에 나올만한일을 겪은 썰..  (0) 201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