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들 잔뜩 부러워하면서 묻더라.
너처럼 예쁜 애를 감히 나 같은 놈이 어떻게 만날 수가 있냐고, 도대체 네가 왜, 뭐가 아쉬워서 나를 만나냐고.
대답 대신 그냥 웃기만 했어. 아마 친구들은 내가 좋아서, 행복해서 웃는 거라고 생각했겠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냥 좋고 행복하기만 한 웃음은 아니었는데.
네가 나를 만나고 있긴 하지만, 사실은 나를 만나기만 할 뿐이라는 그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를 굳이 친구들한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고.
말 안하고 이렇게 그냥 지내다 보면, 혹시 또 모르잖아. 네가 정말 나를 좋아하게 될지도.
친구들이 하도 너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졸라대서 안되면 말자 하는 심정으로 전화했었어.
다행히 근처에 있으니 곧 가겠다고 말해주는 네가, 고맙더라.
그래, 너한테 나,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구나, 어쨌든, 너도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 한 편으론, 차라리 네가 이 자리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도 했어.
내 옆에서 네가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는 거, 친구들한테 들켜 버릴까봐. 내가 억지로 널 붙들어 두고 있다는 거 이 녀석들이 알아챌까봐.
나는 네가 날 좋아해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아마 이 녀석들은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굴고 있단 걸 알면 나를 많이 야단 칠 거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제발 나를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해 주는 척 해주면 좋겠는데... 역시, 어렵겠지?
친구들이랑 같이 있는데 좀 와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네가 말했을 때 잘 됐구나 싶었어.
이제 드디어 네가 내 마음을 알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지. 네가 그 동안 얼마나 내 옆에서 마음 졸였는지... 나도 알지.
내 머리 쓰다듬어 줄 때마다 네가 얼마나 조심스러워 했는지, 내가 너 만나면서도 말없이 뚱하게 앉아 있을 때마다 내 상처 건드리지 않으려고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도 다 알지. 모르긴 왜 모르겠어.
그런 네 노력 덕분이었을까? 정말로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축 쳐지는 날보다, 너 때문에 기분 좋은 날이 더 많아졌다는 걸 알게 됐어.
그런데 그렇다는 걸, 너한테 어떻게 알려줘야 하는지를 모르겠는거야. 뜬금없이 "나 이제 그 사람 다 잊었어!" 이렇게 말하는 건 좀 우습잖아.
잊었다는 말하는 순간에도, 넌 분명히 '괜히 이렇게 말해주는 걸거야.' 그렇게 생각해 버릴 테니까.
그래서 네가 날 오랫동안 기다려 준 것처럼, 나도 널 기다리기로 한 거야. 내 마음에 이제 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걸 네가 눈치 채길. 그러면 넌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면 나도 기분이 좋아졌지.
그런데 넌 계속 내 앞에서 조심하기만 하는거야. 내가 먼저 손을 잡아도 여전히 내 손을 꼭 잡지는 않고, 내가 먼저 집에 데려다 달라고 말하면 금세 좋아하다가도, '정말 그래도 되나?' 바로 그런 눈빛 되고.
네가 제일 좋아한다는 친구들 만날 수 있어서 난 정말 좋았는데, 그런데도 넌 계속 엄마한테 잘못 들키기 직전의 아이처럼 불안한 눈빛.
아니야, 그러지 마...
이젠 알아주면 좋겠어. 난 더 이상 널 좋아하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널 받아들이려고 애쓰는게 아니라, 정말 널 좋아해.
참 고맙게도, 네가 날 그렇게 만들었어...
내리는 소리도 없이 오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가득 쌓여 온통 하얘진 눈 같은
생각만으로도 눈부신 그런 사람이 있었다
예전에 문지애씨가 자정 무렵에 하던 라디오를 매일 듣기도 했었고, 아마 그래서 문지애에 대해 검색하다 이 '그런사람이 있었다' 라는 라디오 코너 모음집들이 있는 블로그를 발견하게 됐을 것이다. 하나 하나 들어보다가 이 편을 듣고 엄청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난다. 북마크 정리하다가 다시 듣고 또 울었다...ㅇ헝허흥
'엄마한테 잘못 들키기 직전의 아이처럼 불안한 눈빛. 아니야, 그러지 마..' 라고 하는 부분이 너무너무 슬프고 와닿아서. 처음 들을 때부터 꾹 누르고 있다가 이 부분에서 결국 참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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