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y

인간 혐오 2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던 어떤 아이의 문자는 내게 묻는 상투적인 안부로 시작했다. 두어번의 문자를 서로 주고 받은 다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눈치가 빨랐던 것일까, 그 아이의 마음이 성급했던 것일까. 바로 이어져 나온 그 아이의 진심, 진짜 용무가 내게 있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잠시였지만 이 인간에 대한 환멸을 분명히 느꼈다.
나는 그 여자아이를 정말 털끝만큼도 좋아하지 않았다. 몇 개월의 부재밖에 되지 않았지만 갑작스럽게 안부를 물어온 그 아이의 마음에는 잠깐 감사했었지만
첫째, 정작 걔는 내 안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로 인해 감사함은 바로 배신감으로 바뀌었고 둘째, 나를 누군가의 연락처를 묻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이 너무 기분이 나빴다.
2007년의 여름, 학교 복도에서 나는 처음 인간 혐오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때 결심했다. 절대 남한테 무언가를 바라지 말자. 하지만 그들도 내게 무언가를 바라게 하지 말자.

많은 사람을 만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만으로 충분히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다. 나는 정말 사소한 것에서 큰 분노를 느꼈다. 평소엔 친하지도 않았던 애가 자기가 뭔가 곤란하거나 부탁할 일이 생기면 'XX아~' 하는 식으로 성을 빼고 이름만 부른다던지, 그렇지 않더라도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며 들러붙는다던지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하면 또 매몰차게 등 돌려 버리는 그런 모습들이 정말 역겨웠다. 더 역겨운건 그런 이기적인 모습이 내게서도 나타났을 때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내 존재 자체가 극도로 혐오스러울 때가 정말 있었다.
2007년에 했던 결심이 깨어질 때가 특히 그랬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도 사실 정말 이기적인 거다. 상대가 곤란하거나 그 상대에겐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 또는 모습을 바라고 그것이 없을 땐 상대에게 실망하게 된다. 왜 그 사람에게 실망하지? 자신 스스로가 애초에 없던 기대치를 세웠으니 그 기대치를 세운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나도 기대치로 인해 실망한 적이 있었지만 상대에게 탓을 돌리는 멍청한 짓은 거의 하지 않았다.

친구 사이라 해도 결국 자신의 용무 혹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을 때 대화를 나누고 접촉을 하게 되는 거지만, 의무적으로 맺고 대화를 하는 그런 친구 아닌 친구 관계도 너무 싫었다.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의무적으로 얘기를 하고, 의무적으로 연락을 하고. 다행히 그렇지 않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2007년에 내게 위에 쓴 결심을 하게 한 아이와 연락이 다시 우연히 닿았을 때 그리고 또 다시 나를 수단으로 이용하려 할 때 난 예전처럼 상처받지 않았고 그 애를 메신저에서 차단하는 것으로 몇 년 만에 닿은 인연을 끊어버렸다. 이유를 친구에게 얘기해줬더니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 같다고 했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냥 연락을 자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처음에는 반가워서 전화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신저로 몇 번 얘기를 나누며 나는 그 애가 쉬는 시간에만 메신저에 접속하거나 전화를 거는 걸 알았고, 그 말은 자신의 심심함을 나라는 수단으로 해소하려는 것이고 나는 절대 남에게 수단으로 이용될 생각이 없다. 수십 번의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음에도 그 애가 별 생각 없이 왜 전화를 안받느냐고만 말할 때 내가 예나 지금이나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신했고 별 죄책감 없이 연락을 끊을 수 있었다.

인간의 이기심과 가식은 인터넷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반말로 별 생각 없이 글을 써대던 사람들도, 가령 어떤 자료가 필요할 때면 익명 게시판임에도 급 존댓말과 공손한 태도를 취한다. 한둘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 걸 보면 그냥 웃긴다. 그래서 나는 존댓말로 부탁하는 글엔 도움을 줄 수 있음에도 일부러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존댓말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익명 게시판에서의 존댓말이 역겹다는 것일 뿐이다. 나는 존댓말 쓰는 걸 아주 좋아함. 상대를 존중한다는 기본적인 표현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는 것에 둔감해지면서 무언가를 관찰할 때 더욱 객관화시켜서 바라보게 되어서 내가 이렇게 삐뚤어진 생각을 갖게 된지도 모르겠다. 정말 친한 사람이 내가 예민하다고 했을 때 말로도 마음으로도 부정했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내가 보편적인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다. 하지만 가끔 지나치게 냉소적이 되어버리는 내 모습에 흠칫 흠칫 하는 걸 보면 완전히 인간다움이 사라져 버린 건 아닌 모양이다. 다행인건가?

글이 너무 앞뒤가 없어서 글로 말하고 싶은 거나 나의 지금 감정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기록해두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사람이 너무 싫다. 나 자신도 너무 싫다. 근데 웃긴 건, 어떤 짓을 하던 결국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신에게로의 관심의 갈구이다. 언뜻 달라 보이지만 조금만 멀리서 보면 모두 같다. 나도 인간을 혐오하면서, 이런 글을 쓰면서 결국 또 다른방식으로 그런 인간들의 관심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존나 애증이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