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y/reView

Rhye / Blood (2018) Review


2013년 첫 정규 <Woman>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이후 라이(Rhye)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 본작 <Blood>에 영향을 미쳤거나, 미쳤으리라 짐작되는 부분 두 가지만 서술해본다. 우선 전작에서 함께 했던 프로듀서 로빈 한니발(Robin Hannibal)이 이번 앨범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불화 같은 이유는 아니며, 로빈 한니발이 보컬 코코 오(Coco O)와의 프로젝트 그룹 쿼드론(Quadron)을 진행할 때 맺었던 계약상의 문제로 인해 듀오로서의 라이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이라는 이름과 컨셉, 비주얼, 데뷔 앨범을 함께 계획하고 만들었던 라이의 반쪽이 없다는 것은 보컬 밀로쉬(Michael Milosh)에게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음악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적 관계로서의 반쪽이 사라졌다는 문제도 있었다. 밀로쉬가 2012년부터 4년동안 함께 했던 배우 알렉사 니콜라스(Alexa Nikolas)와의 이혼이 그것이다. 중간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밀로쉬의 표현을 빌리면 "천천히 폭발하는 것 같았던" 둘의 관계는 그가 2016년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쥬느비에브 미도우 젠킨스(Geneviève Medow Jenkins)를 새로 만나며 끝이 났다. 


두 이별, 그리고 새로운 만남과 함께 시작되었던 불안한 2년간의 작업 끝에 나온 <Blood>는, 큰 부재감 없이 <Woman>에서 느낄 수 있었던 라이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사랑의 일상적 사건들을 어렵지 않은 일상적 단어들로 풀어내고 있고, 곡마다 시점이나 등장하는 상황은 개별적이지만 '사랑'이라는 하나의 제재 안에서 통일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중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많은 것도 밀로쉬의 작사 역량 문제라기보다 일련된 사랑의 사건을 일상적으로 표현하기에 적당한 단어가 한정적이었을 뿐이며, 따라서 유기성 부여의 한 원천이라 할 수 있겠다. 공간감과 더블링을 활용한 보컬과 미니멀한 밴드 및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적당한 일렉트로닉 색채를 얹은 사운드적 기조도 그대로 이끌어 왔다. 앨범의 커버도 모델이 전 부인에서 현 애인으로 바뀌었을 뿐, 흑백 처리된 여성의 나신이라는 점에서 같다.

로빈 한니발이 부재한 라이를 완성하기 위해 참여한 프로듀서 중 도브맨(Doveman), 벤자민 슈와이어(Benjamin Schwier), [Moment]를 함께 작업한 적 있던 킹 헨리(King Henry)가 돋보인다. 더 있지만 참여 빈도나 비중이 가장 큰 프로듀서는 이 세 명이었다. 이들이 라이라는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기에 '라이의' <Blood>가 완성될 수 있었다. 앨범에서 유독 튀는 얼터너티브 락 사운드를 선보였던 [Phoenix]가 밀로쉬의 솔로 작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들이 로빈 한니발의 빈 자리를 제대로 채워주었다는 사실을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앨범 타이틀인 <Blood>의 의미는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가 함구하고 있는 Rhye의 뜻이나 가사, 작업 방식, 라이의 컨셉처럼 모호하고 내밀하다. 가사 내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Blood도 해당 단어가 등장하는 맥락과 의미가 철저히 다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상적 언어와 비교적 직관적인 비유들로 채워진 보컬이니만큼 그것을 귀납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고 보여진다.

'Blood', 또는 'Bleed'라는 단어는 총 네 트랙 안에서 등장한다. [Feel Your Weight]에서는 연인이 그에게 주는 힘으로, [Song For You]에서는 헌신과 희생, [Blood Knows]에선 이끌림, 본능을 대신하는 단어로 등장하는가 하면 [Phoenix]에선 상처를 은유한다. 이것들은 각자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힘이든, 이끌림이든, 상처가 되었든 그 주체가 사랑하는 대상이라는 큰 맥락적 관점에서 같다. 여기에서 다시 각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Blood>는 '연인과 갖고 싶은 긴밀한 유대'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앨범 외부적으로, 불안한 시기 이후 새로운 사랑을 만난 화자(밀로쉬)에게 그런 정서적 유대는 유독 성취하고 싶은 대상이었을 것이기에 더 연관성이 있다고도 보았다.

이 연관성은 앨범 밖의 밀로쉬가 앨범 내 사랑 이야기의 화자와 동일성을 확보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에 유효한데, 사실은 그렇다. [Waste]는 작업 당시 밀로쉬와 전 부인의 이혼이라는 상황을 가장 많이 떠올렸던 트랙이었다고 하며,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애인과 다툰 뒤 사과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기 위해 [Please]를 만들었다. 따로 언급된 적이 없어 다른 트랙들이 가진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대부분 직접 겪은 일을 바탕으로 작업되었으리란 것을 가사를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라이의 매력은 이런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을 누군가의 특별한 순간으로 치환시켜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야기의 진행이나 표현 방식 등에 있어서 청자의 경험과 완벽히 일치되는 곡만 있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렇기에 화자와 청자의 경험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청자는 사랑에 대한 각자의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순간은 앨범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할 것이다.


앞서 <Blood>가 <Woman>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라이의 명맥과 계보를 잇는 앨범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것이 앞으로의 라이에게 있어 다행일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로빈 한니발이 떠난 라이는, 그렇기에 기존에 보여준 색에서의 탈피를 시도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Blood>는 <Woman>의 위상에 많은 부분을 천착하고 있다. 라이의 다른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새로운 것을 들고 왔느냐, 하는 점에서 망설여지는 건 이 탓이다.

<Blood>는 <Woman>의 마지막 트랙에서 애달프게 부르던 사랑의 대상을 다시 불러왔다. 그런데 <Blood>의 마지막 트랙 [Sinful]은 그 사랑의 대상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한 앨범 구성일지, 사랑하는 대상과의 이별과 함께 기존의 라이에서 벗어나려는 선언일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당연히, 후자이길 바란다.


8 / 10

'Silly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비티 Gravity, 2013  (0) 2018.02.17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2005  (0) 2018.02.16
Lapalux / Ruinism (2017) Review  (0) 2017.07.13
Overclass / Collage 4 (2017) Review  (0) 2017.06.10
Kendrick Lamar / Damn (2017) Review  (3) 2017.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