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갑자기 머리를 확 탈색해서 백발로 다녀보고 싶었어요
미용실에 문의해보니 탈색을 세 번 정도 연속으로 하면 아예 색이 빠져서 흰색이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탈색을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냐
라고 여쭈었더니. 반색하시며
"좋은 생각이다. 이미지 변신을 확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 우왕 우리 엄니 열린 사고방식 채고시당 하면서
탈색 세 번 정도 하면 아예 백발이 된다더라. 백발로 다녀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니까
갑자기 정색하시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백발은 할아버지들이나 백발이지. 젊은 애가 머리 하얗게 센 게 뭐가 좋다고...!!"
하면서 갑자기 격렬하게 반대하시더라구요.
얼렐레? 싶었습니다.
노란머리나 흰머리나, 빨간머리나 파란머리나, 대체 뭐가 다른 거지...
그 의문은 10여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가슴 속에 지니고 있고
이제는 차츰차츰 알 것도 같습니다.
우린 익숙한 걸 좋아합니다. 특이하고 괴상한 건 싫어하죠.
아마 그래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생긴 본능 같은데...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뭔가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생각의 유연함 덕분입니다.
하지만 생각의 유연성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죠.
몸의 유연함이 그렇듯, 지속적으로 정신에 스트레칭을 하고 쭉쭉 늘려줘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겪어보신 적 있으실텐데요
"난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않아. 유대인도 흑인도 외국인 노동자도 차별하지 않아. 양성평등주의자이기도 해."
라고 늘 자신을 표현하는 어떤 친구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체중이 많은 사람을 보더니
"으이그... 저 뚱뚱한 것 좀 봐라. 저거 다 자기관리가 부족해서 그래. 존극혐"
이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목격하면 굉장히 의아해지죠. 성소수자는 괜찮고, 몸무게 많은 사람은 안괜찮아? 그게 대체 무슨 생각이지?
하지만
생각보다 비슷한 경우가 많이 일어납니다.
이건, 이 친구가 평상시에 단련한 정신 스트레칭이 딱 거기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과 생각의 틀에 갇히게 됩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다들 갇히기 마련입니다.
성소수자나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는 종종 사회적 이슈가 되고, 피드백이 자주 오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평상시에 생각을 해 두는 거죠. '난 저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자기가 정말로 평소부터 지니고 있는 편견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우는 것 뿐만 아니라, 발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심지어... 머릿속에서만 열심히 평소에 연습하던 스트레칭은
막상 실전에 통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 이런 고민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흑인이랑 같이 밥을 먹어봤는데, 기분이 정말 괴상하더라. 난 내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냥 익숙하지 않은 것에 저절로 반발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렇게 실전과 연습을 겸하다 보면 생각의 힘이 점점 길러지는 것 같습니다.
근육이 만들어지는 매커니즘이랑 되게 비슷하네요.
위의 제 탈색 시도 사례에서 제 어머니는
'젊은애들의 노란머리'라는 타이틀에는 마음을 열어놓으려고 미리 연습을 해 놓으신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젊은애들의 흰머리'에는 아직 준비가 안 되셨던 거죠.
아예 거기에 대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으셨기 때문에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기준도 없으셨고
그래서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그 반발심을 표현하셨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살아 온 방식.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주입된 생각. 태도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는 제 친구가 자기 교실에서의 일화를 얘기해줬는데
어떤 학생이 거짓말을 해도
"괜찮아. 거짓말도 할 수 있어. 선생님한테는 거짓말을 해도 괜찮아. 선생님은 다 받아줄게. 괜찮아."
그렇게 얘기해줬다는겁니다
거짓말은 무조건 나쁜 거라고 교육받으며 자라왔고, 남에게도 알게 모르게 언제나 그 생각의 틀을 강요하던 저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와. 그런 생각도 가능하구나.
그런 교육방식이 옳다 나쁘다를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유연함과 사고 방식의 탄력성에 놀랐어요.
이 친구의 부모님을 뵈면, 왜 이 친구가 이렇게 멋진 생각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얘 부모님이 진짜 짱짱 멋있으신 분들...
아버지가 가부장적이신데, 쓸데없이 으름장만 놓는 가부장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더 강한 남자가 항상 여자를 지켜줘야 한다, 는 사고방식이 기본으로 깔려 있으셔서
자연스럽게 요리도 하시고 설거지도 하시고, 늘 아내에게 헌신하고 정성을 다 하는 분입니다
사실
나도 이 친구의 부모님 같은 부모가 되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굉장히 자주 합니다.
에릭남 아버지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굉장한 화재거리가 되셨지요?
맞습니다. 생각의 힘이란 건 어떤 성장환경에 있었느냐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지요
글을 쓰면서 계속 느끼는 건데, 저 지금 문체가 되게 자기개발서적같네요. 자기개발서적 그켬.
뭐... 어차피 뻘글이니까
하지만 반드시 후천적인 거라고 볼 수도 없지요. 네.
기본적으로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사고방식의 유연성도 조금 더 강한 편이지만, 그것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라구요
아무튼. 취향 존중에 대한 얘기로 시작했죠?
맞아요. 어떤 댓글을 봤는데 "난 취존을 한다. 하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는 식의 이상한 댓글이 요즘 종종 보여서요.
한국인이 산낙지를 먹는 걸 보면서 어떤 외국인이 이랬다고 칩시다. "으, 난 한국의 음식 문화를 존중하지만, 저건 너무 징그럽다."
뭐가 문제일까요?
네, 맞습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그건 좀 아닌 것도 같지만... 그래도 취존합니다."
"저건 너무 징그러워. 하지만 난 한국의 음식 문화를 존중하겠어."
차라리 이 쪽이 되어야죠. 애초에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라는 표현 자체가 "난 취존을 못하고 있다"라는 뜻이지만
그래도 어순을 바꾸면 "난 취존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취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라는 의지의 표명이라도 될 수 있지요.
"난 취존러야! 하지만 그건 좀 아니야!" 라고 말하는 건
"난 이성적이야!(주장) 하지만 비이성적이야!(잘못된 근거)"
이런겁니다. 논리적이지 못해요.
공감하며 이걸 읽는 사람들.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당신 자신 또한 이런 적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물론,
저 자신 또한 취좆러가 된 적이 있을 겁니다... 나도 모르게. 편견의 늪에 빠져서.
그걸 반성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ㄴ자기계발서는 왜 극혐하세요 ㅋㅋㅋㅋ
좋은책두 많은데
ㄴ앗ㅎㅎㅎ써놓고 보니 자기개발서적에서 좋은 배움을 많이 얻는 분들도 많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제가 그만 거기에다 대고 취좆을 때려버리고 말았네요.
여러분 관념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첨부터 끝까지 취존을 부르짖는 글을 쓰면서도 이거 보세요... 아직 멀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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