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와는 다르게 하상욱의 시에 대해 분석을 하기 전에, 그가 시인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을 중점으로 하고자 한다. 그를 다루면서 시 내에서 사용한 알레고리 등 각종 수사적 표현들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며 이는 시 자체 분석으로 보기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작품은 작가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법이다.
하상욱에 대한 문단의 시선은 싸늘하다. 원광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 객원교수로 재직중인 서덕민은 『계간 문예연구 2013년 겨울호』에 투고한 「‘애니팡’ 시인 하상욱과 문화콘텐츠」에서 그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내용을 요약해 보면,
1. 그의 시가 담뱃갑에 각인되어 판매된 이력이 있다는 것과 담배라는 소비재가 갖는 위상의 고려,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시장의 특징, 그의 시가 소비되는 매체의 다양성 등을 결부지어 그의 글을 현 세대가 열광하는, 시가 아닌 콘텐츠로 명명
2. '시팔이'나 '목차' 등으로 보여준 말장난과 전통적 문학관에 기초한 평가로 그의 글이 키치함이며 현대적 삶의 재현이 아니라 반복일 뿐이라고 지적
3. 대중들의 시에 대한 인식수준이 낮다고 가정하고, 그 틈새를 잘 파악하고 끼어 들어간 현명한 문화 콘텐츠 공급자 정도로 결론내림
정도로 간추릴 수 있다. 고려대 명예교수와 한국번역비평학회 명예회장을 겸직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그를 이렇게 논한다.
그는 시의 조각들이 지닐 수 밖에 없는 부족분을 ‘中에서’로 보충하려 한다. ‘中에서’로 지시하는 삶과 경험의 출처가 시의 조각을 시로 완성해주고 ‘시집’으로 팽창시켜줄 것을 그는 기대하거나 기대하는 척한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모든 낙서의 전략이지만 낙서의 약점도 거기 있다. 사실 이 ‘단편시집’의 저자가 그 조각글에서 줄곧 말하고 있는 가벼운 환멸의 경험 가운데 우리의 소설이나 시가 한번쯤 다루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1
우리가 어떤 시를 찾을 때 서점까지 찾아가서 그 시인의 시집을 일일이 뒤져볼 필요는 없다. 기억하고 있는 키워드 몇 개만 있으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전문이 고스란히 보존된 시를 찾을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졌을 때 편지를 쓰기 위해 힘겹게 집 주소를 알아낼 필요가 없다. 핸드폰 번호와 카카오톡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신속한 연락이 가능하다. 미술작품 역시도, 인터넷을 통해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자세히 관람할 수 있다. 이런 기술적으로 진보한 패러다임의 세상에서 시라는 예술이 종이 위의 잉크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원고지가 아니라 인터넷이 글의 발원지일수도 있고, 그 유통 또한 책에만 국한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당위성 있는 움직임을 ‘콘텐츠’라며 비하의 의미를 담은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래서 잘못되었다.
깊이 있는 사유가 없다는 키치함 역시 그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로는 부족하다. 키치함을 비판의 근거로 논하기 이전에 그 역사와, 그것이 의도적으로 쓰이는 베이퍼웨이브(Vaporwave)라는 문화적 동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하며, 단순히 어떤 예를 들지 않아도 키치가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그것이 문학 장르로써 성립하기 위한 몇 가지의 형식이 있지만, 주제에서의 고상함만을 고집하는 것이 형식에 해당되진 않는다. 더욱이 형식의 미달 혹은 파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나는 역으로 하상욱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시의 일정한 형식을 보존하려 노력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동기술법, 의식의 흐름 기법, 자유시, 산문시, 난해시 등 현대 시 문학의 주류가 되는 작법을 보면 시와 소설, 수필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기준이나 형식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우선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장르의 붕괴는 비단 최근의 급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며 오래 전부터 서서히 지속되어 왔던 흐름이다. 하상욱은 트위터의 140자 제한을 형식의 틀로 삼고, 정직하지만 식상하지 않은 상징적 비유와 강박적인 내재율의 사용이라는, 시라는 장르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며 그것을 하상욱과 다른 현대 시인을 구분 지음과 동시에 하상욱 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전략으로써도 사용한다. 그의 시 「알람」을 보자.
늘고마운
당신인데
바보처럼
짜증내요
- 하상욱 단편 시집 '알람' 中에서 -
‘늘고마운’은 문법 파괴가 아니라 시의 주요한 특징인 운율감을 살리기 위한 장치, 시적허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글자 수를 맞추며 내용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갖추게 만드는 것은 시인의 자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집착에 가까운 음수율과 음보율의 사용은 하이쿠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율격 형식이다. 하상욱의 인터뷰를 보며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런 시적 허용을 단순한 운율감 연출의 목적 이상의 관점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본업이 디자인 계통이었기에 ‘더 이상 뺄 게 없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다’라는 관점에서 시의 구조를 생각했고 그러한 미적 관점의 맥락을 통해 글자 수를 맞추거나 의도적인 띄어쓰기 무시 등을 행하고 간결한 글을 창작했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시의 길이가 짧은 것이 비판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황지우 시인의 「묵념, 5분 27초」 같은 전문이 없는 시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다음으로 황현산의 비판과는 다르게 내가 하상욱의 시를 보면서 가장 감탄한 것이 ‘中에서’라는 부분이다. 시 말미마다 붙는 ‘하상욱 단편시집 XX 中에서’는, 그 표현 자체로만 놓고 보면 굉장한 문학적 무지의 소치로 판단하기 쉽다. 한 편의 시에 시‘집’이라 명명한 것도 그렇고, 부분 인용도 아닌 전문에 ‘中에서’라는 표현은 확실히 적절치 않다. 인터뷰를 통해 “제가 ‘~중에서’ 라는 말을 쓰는 이유를 아시나요? 인생은 교집합이잖아요, 제가 경험했듯 글을 읽는 분들의 인생에도 분명히 저와 같은 상황과 감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그들의 인생을 인용하는 것처럼 쓰고 싶었던 겁니다.” 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으나, 저는 그 이상으로 치밀한 계산을 하여 나온 의도된 문구라고 생각했다. 짧은 텍스트의 한계를 시‘집’, ‘中에서’ 라는 문구로 시에 연장된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며, 하상욱 시의 특징이기도 한 수수께끼의 구조를 완결시켜주는 플롯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낸다. 즉 단순히 시 제목과 저자의 표기 이상의 역할을 하는, 시 내용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는 ‘中에서’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끝난다. 2
‘中에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자. 스스로 시(時)팔이(“저는 고매한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에요. 그냥 시를 팔아먹고 사는 시(詩)팔이예요. 멋있지 않나요. 시팔이.”)라며 시인이라 자청하지 않는 그는, 이 ‘中에서’를 통해 그러나 시 문학이 일구어놓은 상아탑에 탑승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대중의 트렌드를 반영하면서 거기에 시인과 시라는 권위를 빌려왔기에 예술 문화를 소비, 혹은 소비한다는 느낌의 허영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은 하상욱과 문학의 개연성을 조금 더 설득력있게 부여해주는 장치가 된다. 3
수수께끼와 공감으로 대표할 수 있는 그의 작품 주제 선정 역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상황을 메타포로 구성하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발동시킨 뒤, 말미에 제목을 공개함으로써 공감이라는 감정과 깨달음을 통해 시 내용에 대한 2차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중첩된 읽기의 과정이 지극히 짧은 텍스트와 리듬 속에서 재빠르게 변주됨으로써 독자는 단시간 안에 희열이나 성취감, 강한 공감 등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이는 분명 유의미한 읽기 방식이다. 주제가 되는 것들이 다분히 일상적인 것이며 그것을 재치있는 알레고리로 미메시스적 접근을 통해 가볍게 꼬아준 것 역시 단점보다는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쉽게 납득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다. 특정 연령대가 타겟인 동시 역시 동시문학으로 당당한 장르가 성립했다는 점에서, 주제나 사용 어휘의 단순성이 비판의 논거는 되기 어렵다. 마광수 교수는 보수적인 문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요즘 상 받았다는 시를 보면, 무슨 놈의 시가 그렇게 어려운지. 소설도 그렇고. 어려운 글은 심오한 글이 아니라 못쓴 글이야. 근데 사람들은 어렵게 쓰는 걸 좋아해. 난해하게 써야 존경을 하지. 내 글은 쉽고 술술 넘어가는데, 그걸 가볍다고 해. 사실 돌아온 사라도 최대한 쉽게 가려고 몇 번을 고치고 고친 거야. 우리나라는 작가들이 문장으로 독자를 고문하고 있는데도, 그걸 존경해. 쉽게 말해서 한국 독자나 비평가들은 마조히스트야. 소설은 엔터테인먼트야. 소설가가 왜 지도자인 척, 슈퍼 엘리트인 척해? 원래 소설가는 ‘쟁이’이야. 옛날엔 도자기 만드는 거나, 소설 쓰는 거나 똑같았어. 어깨의 힘을 빼란 말이야. 대신 나는 딴 걸로 어려운 책을 썼잖아. 이론서에서는 나도 어려운 말 한다고. 다만, 소설은 오락이라는 거지. 소설로 뭘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거지. 내가 문장에서 굳이 ‘의도된 경박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그런 거야. 한국 문학이 너무 잘난 척, 고상한 척을 하니까 저항하는 거지. 왜 고상한 문장을 써야 작가가 존중을 받고 책도 팔리느냐 이거야. 소위 말하는 엄숙주의, 경건주의, 이에 대해 저항을 해야 해. 그렇지만 앞으로 성 문학이 발전하리란 기대는 안 해. 성 이론만 전부 베껴내겠지. 왜냐면 문학은 묘사거든. 예컨대, 사드의 전기부터 영화까지 여러 가지가 한국에 들어오지만, 사드 소설은 번역된 게 별로 없어. 웃기는 거지. 나한테 문학은 그냥, 카타르시스야. 나도 좋고 독자도 좋자 이거지. 나도 대리 배설하고 너희도 대리배설 해라. 교훈? 지도자? 이런 거 없어. 문학은 오락. 그 이상 이하도 아니야.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주장은 에세이를 통해 쓰면 돼.” 4
최종적으로, ‘하상욱 시인’이 갖는 위상과 그가 다루는 언어의 본질, 가치는 ‘농담’에서 찾을 수 있겠다. 예술이 위대한 이유는 특별한 때와 장소에만 있는 게 아니며,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서 주고받는 재치 있고 의미 있는 농담, 그 안에 삶의 정수가 있다고도 할 수 있으며, 이 말은 곧 삶의 정수를 농담을 통해 담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보르헤스가 허구적 인물을 역사적 사실에 덧붙인다거나 거짓된 서술을 주석으로 끼워 넣어, 허구성으로 작품에 진실과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은 회화에서의 트롱프뢰유 기법을 연상케 하기도 하는 농담의 연장선이며, 일제시대 해방시인들의 시 역시 열망의 단어들을 목숨을 걸고 늘어놓는 농담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일상적인 소재에서 삶의 정수를 발굴하고, 미메시스적 접근을 통해 농담으로 재생산한 뒤 그것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함으로써 일견 가볍게 보이지만 많은 고찰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일회성, 빠름, 기술적 진보같은 시대적 패러다임의 속성을 따라가면서도 예술성 또한 잃지 않은 훌륭한 사례라고 그를 얘기하고 싶다.
시는 단순한 메시지 전달의 도구가 아니다. 여타 문학 장르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시만이 가진 문학적 아름다움이 우선되어야 한다. 어떤 교훈을 줄까, 어떤 가르침이 있어야 할까 하는 생각 이전에 자신의 글이 어떤 이미지와 운율적 요소를 갖는지, 단어와 문장들의 배열은 의도대로 되었는지, 낭송했을 때 어떻게 들렸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작품 자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시인은 ‘시’라는 장르를 가지고 노는 사람이지 메시지를 가지고 노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1917년 4월 10일, 뒤샹은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논란이 된 물건을 내놓는다. 독립미술가협회는 뒤샹을 주축으로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설립된 협회였다. 즉, 자신이 만든 협회 전시회에 출품했다는 것이다. 그는 철물점에서 남성용 변기를 구입한 후 ‘R. Mutt'라는 가명으로 사인을 하고 <샘 Fountain>이란 이름을 붙여 출품했다.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 <샘>은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고, 아무도 그것이 작품인 줄 몰랐다. 하지만 이후 그 변기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 이름을 공장(Factory)라 이름 붙이고, 캠벨 수프 캔이나 달러 지폐같은 사물과,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릴린 먼로 등 당대의 유명인사를 주제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나열의 인쇄 방식을 택한 다음 그것을 작품으로 내걸었다.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냉소적인 시선으로 일관하는 사람들 또한 적잖이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미지로 만든 ‘세 명의 엘비스’는 2013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190만 달러에 낙찰되었고, 뒤샹의 샘, 그것도 8번째로 제작된 <샘>은 199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700만 달러에 거래되었다. 그리고 하상욱의 시집 <서울 시>는, 최근 10년간 시집 판매량 4위, 누적 판매량 4만부를 기록했다. 물론 뒤샹과 워홀, 하상욱의 예술에의 접근 방식과 작품이 현재 가지고 있는 위상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거창한 칭호나 명사들과의 동시 나열까진 아니더라도,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문학의 앞길과 가능성을 위해 한 번쯤은 이해하려 노력해 볼만한 성과와 가치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 황현산, 「시의 미래와 낙서의 과거」, 『창작과 비평 2014년 겨울 제 42권 제 4호 통권 166호』, 창비, 2014, 356쪽 [본문으로]
- 김지민, 「여자친구가 “야! 벌레, 벌레!” 소리쳐서 달려갔더니… - 하상욱 『서울 시』」, 채널예스, 2013.03.06, http://ch.yes24.com/Article/View/21595 [본문으로]
- 백승현, 「한줄 詩 모음집 '서울 시'판매 10만부 돌파한 하상욱 씨 "시인이냐고요? 詩로 먹고사는 시팔이일뿐"」, 한국경제, 2014.02.03,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20320831 [본문으로]
- 전아론, 「당신은 마광수를 모른다」, 대학내일, 2011.05.08, http://www.naeilshot.co.kr/magazine-section/naeil-culture/interview/34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