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힙합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폭력적" 음악이다.
주목해야될 부분은 이 성향은 힙합에만 국한된 성향이 아니라 힙합을 비롯한 "흑인음악" 그 자체의 태생이자 본질적 성향이라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미국사회의 흑인들만이 가진 특수성이라고 봐야하는데 이 성향을 힙합만의 것으로 오인하는 리스너들이 굉장히 많다고 느꼇습니다.
노예무역 이후 흑인들에게 가혹한 노동과 일상 생활에서 구제될 유일한 희망은 신의 구원뿐이였고 신에게 구원을 호소했던 것이 바로 '흑인영가'였습니다.
과연 흑인영가 그 내면엔 흑인들의 분노와 증오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위한 폭력성이 없었을까요?
고단한 노예생활 속에서 찾아낸 노동요 '블루스' 역시 그 이면엔 흑인들의 한과 분노라는 폭력적 감성이 만연해있었습니다.
흑인음악. 아니 미국의 흑인음악은 그 시작부터 흑인들의 반역심을 위시한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었던 음악이였습니다.
소울는 어떤 흑인음악보다 선동적이였고 훵크는 역사상 어떤 장르보다 퇴폐적이였습니다.
차이점은 하나입니다. 표현하는 방법에서 힙합은 어떤장르보다 직설적이였다는것.
흑인음악의 많은 세부장르 중 폭력적인 감성을 상징하는것이 힙합이라는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합니다.
힙합이 폭력적이라 소울음악으로 전향했다?? 소울 역시 선동적이고 불만적이며 폭력적인 태생을 갖고있는 장르인데??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힙합을 버릴거였다면 애초에 흑인음악이라는 더 큰 테두리를 버렸어야 했습니다.
▷힙합은 여러 인종과 그들의 여러 전통문화가 뒤섞인 "잡종"문화이다.
미국 흑인음악의 탄생은 모두 백인의 영향력에 기인하게 됩니다.
백인들의 찬송가에 절대적 영향을 받은 흑인영가와 백인들의 민속음악을 블랙리듬과 믹스해 변형시킨 블루스.
아메리칸 니그로들의 블루스음악과 백인들의 클래식음악을 크레올이라는 흑인인종들이 동시 수용해내면서 탄생시킨 재즈.
흑인음악에서 시작된 록음악. 반대로 훵크의 패러다임 중심에 항상 백인의 록음악이 존재했었던 것만봐도 흑인들의 음악적 영감은 주인이였던 백인들의 다양한 음악양식에서 비롯되었던겁니다.
"미국"에서 파생된 흑인음악 자체가 이미 크로스오버 였던겁니다.
혈통으로 치면 오히려 태생적으로 백인음악의 직접적인 유입이 가장 적었던 힙합이 더욱 순수하다고 볼수있죠.
어떤분은 믹스가 기본이 되는 작법을 근거로 힙합을 잡종음악으로 정의하더군요.
샘플링이라는 작법은 힙합을 대표하는 작법일뿐 힙합의 작법은 아닙니다.
같은 형식을 가진 작법이라고 해도 성향은 다를수 있다는겁니다.
아방가르드나 테크놀러지한 음악에서의 샘플링은 장르결합에 이르러 새로운 음악형태를 만드는 목적까지 동반하지만 정통적인 힙합에서 샘플링이라는 믹스적 요소는 장르간에 하이브리드적 성향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특정 선율과 리듬의 구성요소에서 철저하게 타장르의 색깔은 지워내고 무미건조하게 형태만 남은 소리만 샘플링 될뿐 장르적 결합(잡종적인..)으로써 믹스되는게 아니라는겁니다.
그게 힙합에서 기본이 됐던 샘플링 작법입니다. 이후 지훵크를 비롯한 재즈랩등에서 장르결합까지 이루는 샘플링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힙합의 근본적인 작법이라 볼수없는것이죠.
▷ 음악에 대한 편견은 인종차별보다 무섭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장르"라는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음악의 표현 "양식"입니다.
장르에 태생적 성향이 묻어날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음악에 감성을 담아내는건 죽어있는 "장르"라는 허상이 아닌 결국 살아 숨쉬는 "사람"의 사상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폭력성이 다분했던 힙합음악은 장르가 가지는 음악적 성향이라기 보다 음악을 창조해낸 작가의 음악적 감성이 절대적이였다고 볼수있습니다.
시대영향에 따라 그런 감성을 지닌 흑인들이 많았고 그만큼 양적으로 늘어났을뿐 장르라는 카테고리안에서는 그이상의 의미를 두기 힘든것이죠.
음악의 특성과 형식에만 기준을 두는 음악장르에 어느글처럼 굳이 철학성을 부여해가며 문화와 정신의 문제까지 결부시켜 몰아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현재 공론화된 주제에는 순전히 음악"장르"에 한정된 기술적,감성적 한계니깐요.
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감성적 표현을 위해 장르를 바꾸다?"
만약 흑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가 형성되어 더이상 폭력적인 감성이 필요치 않다면 그들은 힙합이라는 음악적 양식을 버리게 될까요??
아닙니다. 힙합이라는 장르(표현양식)를 통해 새로운 감성을 표현하게 될것 입니다.
과연 폭력적 감성이 다분한 사람이 단지 소울음악을 한다고 음악이 온화하게 순화될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반대로 순수한 감성을 지닌 재즈뮤지션이 힙합을 한다고 무턱대고 폭력적인 음악이 나올꺼 같습니까??
피타입이 헤비베이스에서 "스킬의 대한 증명"과 "강압적인 우월함"을 표현해야 했던건 절대 힙합의 근본이 폭력적이여서가 아닙니다.
피타입 자신의 감성이 폭력적이였기 때문입니다.
힙합의 폭력적인 감성을 버리겠다?? 오만한 소리입니다.
힙합이라는 껍떼기를 방패삼아 자신의 폭력성을 정당화 했을뿐 정작 버려야 했던건 '자신'에게 투영되어 있던 내면의 폭력성과 우월감이였습니다.
그 우월감에 도취된 폭력성은 힙합이라는 틀에 만족하지 못할정도에 이르렀고 결국 힙합까지 밟아야 할정도로 그 이상의 자신을 증명해보고 싶었던겁니다.
자기과시적인 폭력성을 버리기 위해 힙합을 그만둔다라고 밝혔지만 사실 그 이면에 더 큰 자기과시적인 폭력성과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헤비베이스는 힙합이였기때문에 쓴 가사였다" 헤비베이스의 가사를 쓴건 힙합이 아니라 피타입 자신입니다. 자신이 직접 펜을 잡고 써내려갔던 가사입니다.
작가가 자신이 쓴 글에 책임을 지지못하고 힙합이라는 장르에 책임을 전가시키고 힙합 탓을 하는 모습은 정말 실망적인 부분이였습니다.
여기서 궁금한건 과연 헤비베이스라는 앨범이 힙합의 한계를 봤을정도로 궁극에 가까운 음악이였나?라는 것입니다.
랩이란 분야에서 분명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힙합의 정점을 찍은 앨범은 절대 아니였습니다.
단언컨데 헤비베이스는 랩이란 요소에서 한국힙합의 과도기시절 가장 명확하게 한국힙합의 "출발점"을 제시한.. 즉 시작을 알린 앨범이였지 결코 힙합의 궁극적인 퀄리티를 담아낸 마지막 "결승점"이 아니였다 생각합니다.
기본바탕, 아주 기본적인것을 보여준겁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말이죠.
그 기본에서 파생될 무한한 음악적 영감을 그는 믿지못한듯싶습니다. 아니면 그 기본이 힙합의 궁극으로 착각했다거나..
개인적인 생각일수도 있으나 랩을 선율로 봤을때 피타입의 랩이 가진 선율적 음감은 음악에 투영된 소울의 표현이 아닌, 아직도 기술적 우위의 증명을 위한 음감을 보여주고있습니다. 그의 스킬적 음감은 스무스한 음감이 필요한 부분조차 인정하지않는 잔인할정도의 랩멜로디를 보여줬으니 말이죠.
결국 그는 힙합으로 표현할수 없었던 감성을 재즈로 표현한다라고 했습니다.
큰 착각입니다. 폭넓은 감성을 힙합에 담을수 없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자신의 그릇이 작았기 때문입니다.
"음악의 상.하 혹은 질적인 부분에 있어선 장르라는건 사실 무의미하다. 결국 음악을 만드는건 사람이였고 모든것은 뮤지션 개인의 역량에서 판가름날뿐이다."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음악이라는 예술은 결국 작가의 감성을 투영하는것이지 장르의 태생적 성격을 담아내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힙합의 작법은 단순해져있다.
음악하는 사람들이 "Endtroducing"을 처음 접하고 항상 반복적으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이건 인간이 만들수없는 영역이다"
당연하죠. 샘플링이였으니깐 가능한 영역이였습니다.
피타입은 작법의 한계를 말하더군요.
작곡과 리얼연주를 통해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든, 샘플링이란 방식을 통해 "개인"이 가질수있는 발상의 한계를 넘어서든, 반대로 샘플링에 발목잡혀 음악적 한계에 부딪히든, 그건 전적으로 뮤지션의 역량문제일뿐입니다.
작법에 대한 한계를 느꼈다는건 결국 자신의 음악적 한계를 느꼇다는 말이 됩니다.
힙합은 주체성이 강한 음악입니다. 여타 음악처럼 다른 장르적 요소가 침투했다고 특유의 리듬이 쉽사리 변형되지 않습니다.
어느 장르가 섞이 더라도 그 강직한 힙합리듬은 바탕을 지켜냅니다.
이것이 뜻하는것은 힙합이라는 카테고리를 훼손시기지 않고도 많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소화해낼수있는 장르라는겁니다.
정말 발전이 무궁무진한 장르중 하나가 바로 힙합입니다. 그 한계를 피타입은 딱 잘라 정의해버린것이죠.
장르흡수는 어떤 음악이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장르성격이 결정되는것입니다.
록은 정말 수많은 감성과 장르를 흡수하면서 셀수없을 정도의 많은 세부장르를 파생시켰지만 모두 록의 카테고리안의 장르로 단단히 인정받았습니다.
힙합이라는 튼튼한 바탕을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 그 바탕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고 엄격한기준을 만들면서까지 그외의 것을 힙합으로 인정하지못한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부분이였습니다.
▷ 그런데 결국 힙합이다.
모든것을 부정했습니다. 힙합의 음악적 한계부터 감성적 한계까지..
힙합이 가지는 문화적 특성과 형식과 정신까지 그 모든것을..
흥미를 잃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더이상 듣지도 듣고싶지도 않다할정도로..
추천글에 있는 김상례씨 글은 이제 내려야될때가 된거같습니다.
제목대로 글쓴 자신조차도 피타입을 이해하지 못했더군요.
"힙합의 기준이 누구보다 엄격했던 피타입, 변한 자신의 음악을 힙합이라 할수없었다?? 피타입이 버린다고 표현했던 힙합은 자신의 기준에서 엄격했던 헤비베이스같은 하드코어적, 폭력적힙합이였을뿐이다."
어떻게 이런 논리를 유추해 냈을까.. 피타입도 읽으면서 놀라겠습니다.
이 논리대로 라면 피타입이 인터뷰에서 힙합을 듣지 않는다고 한건 자신의 기준에 엄격했던 폭력적 하드코어 힙합을 더이상 듣지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자신이 듣고있다는 앞으로도 평생 들을것이라 했던 소울은 자신의 엄격한 기준에 벗어났었던 힙합음악, 음악과 감성이 자유로운 힙합음악(우리가 일반적으로 힙합의 기준에 넣는음악)까지 포함되고 있다는겁니까??
정신 차리세요. 피타입은 힙합 그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힙합을 듣고 싶지도 않다고 할정도로 이미 힙합으로 부터는 멀어진 척을 했고,
"나는 힙합을 정의해버린 음악을 만들었고 힙합의 한계점까지 갔었던 뮤지션이다"라는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있는겁니다.
그런데 결국 힙합입니다.
자신이 무슨음악을 하는지 그 정체성조차 잃어버린 뮤지션이 한장르의 끝을 봤다면 저는 그말에 동감할수없습니다.
힙합의 범주에 속한 랩이란 보컬을 차용하면서도 스스로 힙합을 버렸다고 공식화한건 결국 힙합이 가진 음악적 감성, 그 한계를 개인이 "감히" 단정 지어버린겁니다.
타악화된 보컬을 사용할뿐이라는 그의 변명은 이미 힘을 잃는것이지요.
랩에서 라임은 미국의 것이 아니라 힙합의 것이다고 말한건 바로 피타입이였습니다.
힙합을 버리고 재즈를 한다고 했으면 스캣을 비롯한 레카토한 재즈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어야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랩을 했고 그의 랩은 1집과 형식적으로 달라진건 전혀 없었습니다.
랩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했다면 적어도 힙합을 버렸다라는 오만한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음악의 형식은 변한것이 없는데 그 음악을 버렸다라고 한건 결국 감성적인 면을 겨냥했다는 것이고 이말은 곧 '자신의 영감을 담아내기엔 힙합이란 그릇은 작다.' 혹은 '유일하게 힙합이 가진 감성적 한계와 힙합의 음악적 한계를 벗어났다'라는 말밖에 안되니깐요.
이것도 아니고 단순히 The Vintage의 사운드를 가리켜 힙합을 벗어났다라고 한거라면 피타입은 아직 멀은겁니다.
여전히 비트는 랩을 위한 안배이며 작렬하는 힙합드러밍만 숨겼을뿐 무언의 리듬은 철저하게 힙합이였습니다.
어느 누가 The Vintage를 재즈라고 생각하며 들을것이고, 어느누가 그음악을 소울이라 생각하며 듣겠습니까??
빈티지를 재즈로 접하고 있다는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결론은.. 안해도 될말을 굳이 자극적인 단어까지 포함해 공식화시키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허세는 그만 부리시고 정말로 힙합의 한계를 증명해보이고 싶다면 조용히 음악으로 보여주시길 바랄뿐이라는 겁니다. 적어도 뮤지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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