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py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1독.

인간은 자기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마련이다. 아니, 자부심을 갖기 힘든 경우에도 자부하려고 든다.


요즘 세상에 살아가기 쉽도록 좋은 부모가 솜씨 좋게 낳아 주었다면 그건 행복한 일이지. 그러나 적합하지 않게 태어났으면 세상에 맞추지 않고 그냥 참던가, 아니면 세상이 나한테 맞춰줄 때까지 참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주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세상에 무슨 인과로 이렇게 이상한 얼굴을 가졌으면서 창피해 하지도 않고 20세기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자기 자신이 정말 싫어졌을 때, 혹은 자아가 위축되었을 때는 거울을 보는 것만큼 약이 되는 일도 없다. 외모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명백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얼굴로 어떻게 여태까지 사람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며 살았을까 하고 깨달을 것이다. 그 점을 깨달았을 때가 인간의 평생 중에서 가장 고마운 순간이다. 자기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을 때만큼 사람이 위대해 보일 때도 없다. 이렇게 자각한 바보 앞에서는 모든 '대단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며 황송해 해야 한다.


처음으로 해삼을 먹어본 사람은 그 담력에 감탄할 것이요, 처음으로 복어를 삼켜본 사내는 그 용기가 가상타 해야 할 것이다.해삼을 먹은 자는 신란의 재림이라 할 것이요, 복어를 삼킨 자는 니치렌의 분신이라 할 것이다.


신은 인간이 괴로움 속에서 날조해낸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고뇌의 똥이 뭉쳐져 있는 냄새나는 시체에 불과하다. 의지할 바 없는 것을 의지하며 평안하다고 한다.


사람을 사람처럼 보지 않으면 겁날 것이 없다. 사람을 사람처럼 보지 않는 자가 나를 나로 여기지 않는 세상에 화를 낼 수는 없다. 부귀영달을 얻은 자는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저 남이 나를 나라고 생각지 않을 때만 갑자기 화를 낸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잠복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뭔가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일을 아는 것처럼 떠들고, 학자들은 아는 것도 알아듣지 못하게 한다. 대학 강의에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는 사람은 평판이 좋고, 알아듣게 설명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다만 전혀 모르는 채로 있어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까 자기 멋대로 주석을 붙여서 뭔가 이해한 척한다. 모르는 것을 알았다고 착각하며 존경하는 것은 예로부터 기분이 좋은 일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일이 종종 생긴다. 고집을 끝까지 부려서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당사자의 인물 평가는 뚝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잇아하게도 고집을 부린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기 체면을 세웠다고 굳게 믿고서 그 이후 남이 경멸해서 상대해 주지 않는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이다.


덧없는 것을 덧없다고 알면서도 기대할 때는 그저 그 기대만 머릿속에 아름답게 그려 놓고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 편이 좋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마음속의 기대와 실제 상황이 맞는지 틀리는지 어떻게든 시험해 보고 싶어진다. 시험해 보면 반드시 실망할 것이 뻔한 일조차 마지막 실망을 스스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때까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져, 싣단 말야, 잉(싫어, 싫단 말이야)."


일어나겠다고 하는데도 계속 일어나라는 잔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게 마련이다. 주인처럼 철이 덜 든 사람은 더욱 기분이 상한다.


인간을 정의하라면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저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존재라고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관계가 적은 곳으로는 자연히 마음도 적게 가기 마련이다.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을 위해 눈살을 찌푸리거나 눈시울을 붉히거나 탄식을 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경향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정이 많고 남을 위하는 동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 세금의 일종으로 가끔씩 사회적인 교제를 위해 눈물을 흘려보기도 하고,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할 뿐이다. 말하자면 사기성이 있는 표정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힘이 드는 재주이다. 이런 속임수에 능한 사람을 예술적 양심이 강한 사람이라 하며 이런 사람은 사회적으로 매우 소중히 여겨진다. 그러니까 남들에게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람일수록 수상하다고 봐야 한다. 한번 시험해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 주인은 오히려 서투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서투르기 때문에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알아주지 않으니까 내부의 냉담함을 공연히 숨기지 않고 그냥 내놓고 산다. (…) 여러분은 냉담하다고 해서 우리 주인과 같은 선량한 사람을 미워해서는 결코 안 된다. 냉담함은 인간 본래의 기질이고, 그런 기질을 숨기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 솔직한 사람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럴 때 냉담함 이상의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야말로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나쁜 일이 겹치고 꾸지람을 듣고 거기다가 남이 돌아보지도 않을 때에도 태연자약하게 있을 각오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남이 나에게 침을 뱉고 똥물을 뒤집어쓰고 그런 나를 보며 모두들 큰 소리로 비웃는 것을 들어도 이를 기분 좋게 받아들여야 한다.


바둑을 발명한 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기호가 국면에 나타난다고 한다면 답답한 바둑돌의 운명은 치사하고 작은 일에 집착하는 인간의 기질을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기질을 바둑돌의 운명으로 헤아려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이란 광활한 천지를 앞다투어 좁혀서 자기가 디디고 서 있는 두 발 외에는 도저히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도록 졸렬한 재주를 부려 자기 몫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고통을 일부러 구하는 존재라고 평해도 좋을 것이다.


"자네는 처음부터 져도 상관이 없는 사람 아닌가?"

"나는 져도 상관이 없지만 자네가 이기게 하고 싶지는 않네."


내 생각에 인간이 절대적인 영역에 들어가는 데에는 두 가지 길밖에 없는데, 그 두 가지 길이란 예술과 사랑이지.


속 편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에서 서글픈 소리가 난다.


여러 선생들의 설에 따르자면 인간의 운명은 자살에 귀착한다고 한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고양이도 그렇게 답답한 세상에 태어나야만 하게 생겼다. 무서운 일이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울적해진다. 산페이 씨가 가지고 온 맥주라도 마셔서 흥을 좀 돋구어야겠다.


유리컵 속에 든 것은 뜨거운 물이라도 차가운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고양이와 맥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점점 몸이 따뜻해진다. 눈가에 열이 오른다. 귀가 후끈거린다. 노래가 부르고 싶다. '고양이다 고양이' 하고 춤을 추고 싶다.


마지막으로 휘청휘청하면서 일어서고 싶다. 일어서서는 건들건들 걷고 싶다. 이것 참 재미있군 하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나갈 수 없다고 뻔히 알고 있는데도 나가려고 하는 것은 억지다. 억지를 부리려고 하니까 괴로운 것이다. 재미없다. 스스로 나서서 괴로워하고, 스스로 좋아서 고문을 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고맙고도 고맙도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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