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py

2001년 원주행 버스

J.D 샐린저의 소설을 읽었더니만 그의 문체로 할 말들이 떠오른다.

2001년 겨울시절의 이야기다. 벌써 7년전인가? 미치겠군...시간은 정말로 강물처럼 흐른다.

당시 나는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gg를 만났다.

그녀는 캐나다 유학을 며칠 앞둔 상태로

어렸고, 두려웠고, 가족과의 이별때문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했다.

물론 나도 군 입대를 한 달 앞두고는 했으나

원체 생각없이 잘 살아왔기 때문에 괜찮았다. 밥을 잘 먹어서 살이 찌기까지 했지.

아마 75kg 까지 불었는데 입대하면 빠질거란 생각으로 그냥 내비두었다.

언제나 그런식이었다.

 

gg는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고, 타이밍 좋게 그게 나였기에 나를 만나준다는 걸 사실 나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그걸 대놓고 말한적도 없고 단지 내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것 같긴 하다.

 

던킨 도너츠에서 커피를 마시고 헤어질 때가 밤 열 시쯤이었다.

gg는 내게 내일 함께 원주를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원주?"

"어 운전면허증 교부를 원주에서 받아야 되거든."

"아...그렇구나. 몇시에 가는데?"

"아침 일곱시쯤에."

"뭐야. 새벽에?"

"나 할 일이 많아. 오후엔 여권이랑 티켓때문에 서울에도 가봐야 되거든."

"그러지 뭐. 여섯시 오십분까지 정류장에서 보자."

 

하지만 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는 보통 새벽 다섯시쯤에 잠을 취하고 낮 열 두시쯤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건 군 입대를 앞둔 대학생의 일반적인 생활패턴으로

나 말고도 수 십만명이 그랬을 것이다.

일단 잠이 오지도 않거니와 운 좋게 잠에 들더라도 그 새벽에 일어나는 건

군입대가 취소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커피 다섯잔을 마셔가며 밤을 샜다.

젊었다기 보다는 어렸기에 밤 하루 새는 것은

전혀 힘든일이 아니었다.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따라 정류장에 도착하니

gg가 보였다. 진하지는 않았지만 엷게 화장을 하고 나온 그녀가 예뻐보였다.

 

버스 안에는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슈웅 하는 소리와 함께 히터가 틀어졌고

건조하고 따스한 공기가 밤을 샌 나의 눈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몽롱한 기운, 밤을 샌 몸속의 피가 조금씩 데펴지기 시작했을 때

고개를 돌리니 내 옆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여자가 앉아 있었다.

 

일곱시 사십분 쯤 슬슬 해가 뜨기 시작하자

(진부한 표현이지만) 버스안은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뜬금없이 내 심장은 쿵탕쿵탕 뛰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다행히 버스의 엔진 소리 때문에 들리지는 않았다.

 

난 슬며시 gg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을 잡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에도 몇 번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뭐랄까, 그녀는 겁 많은 고양이와도 같아서

평소 손 조차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때는 gg도 가만히 있었다.

 

"후우...그래..." 라고 gg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한숨이 무얼 의미하는지 대충 알수 있었다.

 

원주에 도착하고, 면허증을 교부받고, 터미널에서 국밥을 먹고,

눈길을 잠시 걷다가,

다시 구리로 오는 버스에서

gg는 어제 찾았다며 자신의 사진들을 보여줬다.

맘에 드는게 있으면 몇 장 가져가라고 했지만 난 됐다고 했다.

그녀는 이틀 후면 캐나다로 떠난다.

난 한 달 후면 군대로 떠난다.

우리는 겨우 손 한번 잡은,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다.

난 사진 대신 2001년 12월 28일 구리-원주 도장이 찍힌 버스티켓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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