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py

무슨 연구소라도 차렸습니까?

좀 공격적인 이야기입니다.

 허영만의 식객을 읽다가, 이 부분이 저의 가슴을 쳤습니다.

 "와인을 즐기는 한국인들은 와인을 즐겁게 마시지 않고 엄숙하게 마시는 것 같습니다. 거의 소믈리에 수준입니다. 색깔을 보고, 흔들고, 향을 느끼고, 입에 머금고, 와인의 복잡한 향을 끄집어내려고 애를 씁니다. 크리스털 잔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고요.

 

 거기에다 와인에 대한 지식을 경쟁하듯 늘어놓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주눅 들어 아무 말 못합니다. 잔을 이렇게 들어야 손의 열기가 와인에 닿지 않아 제대로 마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렇게나 잡으면 어때요? 손 때문에 잠깐 사이 변하는 와인의 온도를 느낄 수 있나요? 일반인들은 불가능합니다."

 

 <허영만, "식객" 89화 - 불고기 그리고 와인 中 프랑스인의 말>

 ……

 와인만 저런 게 아닙니다. DSLR분야에서도 온갖 쇼를 다 합니다. 그레이카드로 화밸잡고, 플래시에 반사판에 삼각대에… 렌즈는 화각대를 다 갖추어야 한다며 이러쿵저러쿵, 게시판에서는 이건 이래서 어쩌네 저건 저래서 저쩌네 말은 많고… 사진은 발로 찍으면서 말이죠. 하하

 포터블 음악감상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기에다가 음향특성에 대해 '아침나절에 쏟아지는 햇살'같은 모호한 표현을 쓰는가 하면, 이어폰 폼팁을 바꾸었을 때의 차음성 향상과 음색의 변화에 대해 거의 논문 쓰듯이 말을 줄줄 늘어놓습니다. 자신이 써버린 수많은 돈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작은 차이점 하나라도 찾아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무슨 연구소라도 차렸습니까?

 오죽하면 이런 사람들 낚으려고 건전지별 음향차이, 발전소별 음향차이 같은 글이 올라왔겠습니까. (아니 뭐 당신 동네에 전기를 공급하는 화력발전소가 북해산 브렌트유로 연료를 바꿨더니 오디오로 듣는 음이 청정해졌다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산 50만원짜리 이어폰이, 전에 쓰던 20만원짜리 이어폰에 비해 별 차이가 없으면 어때요? 뭔가 소리가 좀 좋아진 거 같고 기분 좋으면 된 거지. 아니면 솔직하게 말합시다. "50만원짜리 샀는데, 내가 들을 때는 20만원짜리하고 별 차이가 없는 거 같다. 솔직히 나 좀 낚인거같음. 어쩌지?"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음악을 듣는 소비자이지 음향 연구소의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좋은 장비로 즐겁게 음악을 듣도록 합시다. 나쁜 장비와의 차이를 들으려고 몸부림칠수록… 그 차이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 않은 스트레스와 지출이 수반됩니다. 당신이 당신의 장비에 대해 여러 가지 복잡한 필설을 펼쳐놓을 수 없다고 해서 당신이 그 장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게 아닙니다. 그 장비로 즐겁게 많은 음악을 들었다면, 당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것을 충분히 잘 사용하고 이해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