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y

쥐궁시

오선지 2013. 1. 25. 16:58
사랑은 일년에 한 번 맞는 생일처럼, 한 번 밖에 찾아오지 않는 삶처럼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공평하게 찾아오고 때론 떠나가기도 하는 거야. 나도 공주 쥐를 사랑할 자격이 있어.
 
일 년에 단 한번 뿐인 공주의 생일 행진을 바라보며 말하는 검은 쥐의 코 위에 온 거리에 날리는 색색의 종이들 중 하나가 내려앉았다. 가볍게 재채기를 한, 온 몸이 눈처럼 새까만 시궁쥐에게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확신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 나무 덤불 안에서 모두가 하나처럼 지내던 시절 시궁쥐는 자신이 사는 마카디아 공국의 공주 쥐에게 이름 모를 하얀 꽃잎을 받은 적이 있던 것이다. 그것은 수국의 잎이고 꽃 도감은 물론 책 하나도 들춰볼 기회가 없던 시궁쥐는 평생 그 사실을 모를 것이었지만 그게 중요한가? 꽃잎에는 잘 말린 장미꽃 냄새같은 공주 쥐의 숨결이 묻어 있었다. 공주 쥐가 무슨 의미로 그것을 건내주었든 못난 시궁쥐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사랑이 이뤄질 확신의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외로워서 허리가 굽는 밤이면 시궁쥐는 꽃잎의 뾰족한 부분을 코에 쿡, 쿡 찔러댔다. 그러면 향기가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았다. 향기를 맡으면 차가운 별빛들은 참나무 더미들이 타닥 타닥 타오르는 난로가 되었고, 벽 틈새로 스미는 찬 바람들은 폭닥폭닥한 이불처럼 몸을 보드랍게 감싸주는 것 같았다. 그러면 겨우 허리를 펴고 잠들 수 있었다.
 
쥐 국민들의 환호성 사이로 우연히 시궁쥐의 말을 들은 공주 쥐는, 어먀 저게 무슨 소리람. 사랑이 일 년에 한 번 맞는 생일처럼 공평하다면 왜 나의 생일엔 모두가 기뻐해줄까. 거기다 그 말을 한 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처럼 근사한 이름도 없고, 새틴처럼 잘 빗어진 곱고 흰 털도 없쟎아, 하고 비웃었다. 공주 쥐가 타고 가는, 나무 판자 뒷편에는 그녀의 이름인 '실버 불레또'가 음각으로 파여져 있었다. 그리고 파여진 것은 나무뿐만이 아니라 공주 쥐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하양 쥐가 까만 쥐에게 꽃잎을 전해준 뒤 벌써 5개월이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 날은 공주 쥐의 생일이자 각 국의 왕자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멋지게 차려 입고 오는 날이기도 했다. 행렬을 따라가다 저도 모르게 그 사랑의 파티장까지 따라간 시궁쥐는 날카로운 포오크를 든 병정 쥐들에게 가로막혔지만 멀리서나마 울긋불긋한 파티의 풍경을 볼 자비를 베품받을 수 있었다. 시궁쥐는 내심 자신도 그 파티에 낄 자격이 있다 생각하는 중이었다. 내 코는 잘 익은 절인 올리브처럼 축축하게 윤기가 돌고 아주 부드러워. 힘찬 꼬리는 또 어때! 언젠가 본 뱀 청년처럼 절도있고도 힘찬 채찍 같은 걸. 흐뭇하게 꼬리를 위아래로 힘차게 휘젓다가 병정 쥐의 무언의 경고에 그만두었다. 어느샌가 실버 불레또 공주는 파티에 걸맞는 의상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온 몸은 밤에 내린 눈을 보는 듯 군데 군데가 반짝였고 연분홍색 입술은 빗어진 털들 밑으로 살포시 나와 있었다. 무엇보다도 입술 색에 맞는 코랄빛 드레스는 일순간 파티장과 그 밖의 구경군들을 헉, 하고 긴장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실버 불레또 공주에게 다가간 것은 호랑이 나라에서 온 왕자였다. 그는 포마드를 은근히 바른 갈기를 뽐내며 불타는 빨강, 흰 드레스같은 하양, 어느 빛도 밝히지 못하는 어둠같은 검정 털들이 무늬를 이루는 꼬리를 태양에라도 닿을 듯 꼿꼿이 세우고 공주의 주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다. 덩실덩실 거리며 춤 출 때마다 그가 입은 에메랄드니 오팔이니 하는 멋드러진 이름이 붙은 색깔 돌들로 장식된 황금 망또가 번쩍거렸다. 시궁쥐는 자신의 꼬리를 죽 늘어뜨려서 그만 꼬리 끝이 더러운 진흙탕에 잠기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자랑스러웠던 꼬리는 갑자기 거추장스럽게 느껴졌고 조금이라도 더 늘이면 툭 툭 하고 끊어질 것 같은 싸구려 고무처럼 보였다.
 
다음으로는 왕세자 코끼리가 나타났다. 코기리는 가시라도 밟은 것인지 안색이 파리했지만 그보단 휘황찬란한 장식들이 더 눈에 띄었다. 이마와 단단하게 굽은 등에 아라베스크 무늬의 진홍색 벨벳 카페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카페트 모서리에는 금색 실들이 꽈배기 모양으로 꼬여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코기리는 정중히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한 뒤 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앞뒤로 가볍게 흔들었다. 재미난 유희에 공주 쥐는 까르르 웃었다. 시궁쥐는 저도 모르게 앞 발로 자신의 코를 가렸다. 멋지고 긴 코길이의 코에 비하면 자신의 코는 충분히 축축하지 못하고 바짝 마른 사막의 대지처럼 느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