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py

불쌍한 내 20대에게

난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만 해도
여자랑은 눈 마주보고 말한마디 해보지못했을 정도로 쑥맥이었고
그냥 음악듣는걸 좋아하고 게임 좋아하고 만화그리기 좋아하고
아버지에 눌려 어쩔수 없이 공부하는 그런 평범한 놈이었다

지금은 유명한 어느 힙합팀의 랩퍼가 고등학교 당시 반 친구였는데
조피디가 짱이야 드렁큰타이거가 짱이야 논쟁을 벌이다가
정신차려보니 어느샌가 같이 랩하고 가사쓰고 있었다
난 원래 락을 더 좋아하고 당시 불법적으로 엄청 돌고 있던 엑스재팬에 환장하고
라디오헤드 크립에 미쳐서 OK COMPUTER 앨범까지 샀다가 음울한 브릿팝에 발을 들이던 놈이었는데
드렁큰타이거가 난 널 원해로 방송에 나온걸 보고
와 시발 이런 감성적인 랩이 라면서 랩한다고 깝죽댔던것 같다
그 당시엔 다음넷에 유명한 힙합동아리가 있었는데
마침 정모를 한다고 공지가 올라왔었고
친구는 나에게 거길 꼭 같이 가야 한다고 반 협박성 약속을 받아냈었다
정모 당일날 부담을 느낀 내가 너 혼자가라고 했더니 친구가 나한테 죽여버린다고 했었던거 같다

그 곳은 동네밖에 모르던 나한테 완전한 신세계였다
우린 그곳에서 잘 적응했고 친구는 랩실력을 인정받아서 좋은 사람들과 음악활동을 시작하게 됐고
난 그곳에서 첫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 아이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고시원에서 혼자 살고 있었고
나보다 2살이나 어린 나이에 술집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많은 아픔이 있었고 벌써 세상을 어느정도 알게 된 그 모습에
어쩌면 동정심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난 1년가까운 시간동안 그 아이를 좋아했고 오랜 기다림끝에 결국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한달도 안되 나와는 많이 달랐던 그녀를 내 손으로 차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주위에서 걔는 아니라고 만류하던 친구들의 말에
얄팍한 내 마음이 흔들렸던 거였으리라
전화로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나에게 그 애가 울면서 했던 말은
이래서 나와 사귀고 싶지 않았다고
친구로 영원히 옆에 두고 싶었다고
당시에는 그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은 알것 같다

사람이란게 참 이기적이면서 용감한거라
난 그후에 그 인터넷 동아리에서 마스코트로 꼽힐정도로 귀엽고 이쁜 여자애에게 대쉬를 했고
일주일정도후에 오케이를 받아냈다
무슨 용기가 나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주제에 난 내스스로 음악하는 뭐라도 된것 마냥 자신감이 있었고
순진했던 그녀에게 그런것이 먹혔던 것 같다
음악한다고 공부도 때려치고 대학은 필요없다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기전까지 그 황금같은 시간을
그 인터넷 동아리라는 우물안에서 랩을 하며 우쭐댔고
여자친구와의 달콤한 시간을 만끽하면서
3년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군대에 가고 많은 남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녀와의 시간도 내가 상병을 달기 전에 끝이 났다
난 무기관리병이라는 상근예비역이었고
그녀를 충분히 주말마다 볼수 있었지만 확실히 예전같지 않았고
그녀는 우리가 힘들때마다 가까운곳에서 힘이 되어주던 남자에게 돌아섰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크게 된다고
연애의 달콤한을 알게 된 나는 누군가 옆에 있지 않으면 참을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양껏 우울함을 풍기면서 어깨위에 저승사자를 엎고 다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침울하고 말이 없어지던 내게 
아직도 잊을수 없는 한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뭔가 나에겐 눈부신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름답고 지적이었고 음악에 대한 지식도 나와는 비교가 될수 없을 정도로 풍부했다
특히 브릿팝, 락쪽에 대한 지식이 엄청났는데
국내에서는 웹상에서 음원조차 구하기 힘든 
하지만 너무나 좋은 명곡들을 쉴새 없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별과 군생활로 힘들어하고 어두워져있는 나에게 
그녀는 우울의 뿌리를 뽑아주겠다며 만남을 제시했고
일주일에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게 되던 어느날
집에 바래다 주던 날 골목길에서
한번만 안아봐도 되냐고 묻던 그녀의 품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 정도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우리는 사랑했다

사랑이었다고 믿고싶다
사랑이었다고 확신한다
설령 그녀가 날 떠난 이유가 나와 같은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나와 헤어진 후에도 
만난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나와 만나며
날 괴롭혔던 것이리라

낭비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우린 밝진 않았지만 참 잘어울리는 커플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때 만지작 거리고 들었던 음악들이 
충분히 영양가 있는 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었고
다시 없을 정도로 사랑했었다

하지만
20대의 마지막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난
누구나 입을 모아 말하는 낙오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회에 순응하기 보다 그 안의 오류를 꼬집는걸 먼저 알았기에 섞이기가 힘들었고
그녀와 헤어진후 만난 몇명의 여자들에게서는 
어느새 헤어진 그녀의 모습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음악역시도
허울좋은 핑계일뿐
난 이것들에게 내가 가진 것의 반의 반조차도 노력하지 않았던것 같다
골방에 틀어박혀 하루하루 일에 시달려 지쳐잠들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음악에 매달려 있는
그리고 이런 나에게 호의로 다가온 여자에게
상처범벅인 모습으로 피묻혀 달아나게 만드는
괴물이 된 기분이다

무엇하나 이뤄놓은 것은 없고
사회는 나에게 나이에 맞는 직위와 생각을 요구하고
난 어느새 낭만과 진심을 노래하기보다
월세와 빚, 통장 잔고를 계산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멍청하게 웃곤 하던 거울속 내 표정은 점점 신경질 가득 찌푸리고 있고
누구한테도 화를 내본적이 없던 내 말투는 
무슨 말을 하건 시비조로 나와 상대방을 기분나쁘게 만든다

내 불쌍한 20대
노력하고 이뤄가며 얻어나가는 것을 모르고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한 상실감만을 먼저 배웠고
음악에 대한 꿈을 위해 나아가지 않고
여자와 즐기는 것만을 알았던
주인을 잘못 만난 내 20대

빠삐옹이 꿈속에서 만난 재판관은
무죄를 주장하는 빠삐옹에게 
인생을 낭비했다는 죄목으로 판결을 내려 아무말 못하게 만들었다

세상은 허영과 공허에서 허덕이던 내게
절대로 먼저 손내밀어 주지 않았다
내가 보낸 시간에 대한
정확한 세금을 매겨 빚을 안겨줬을 뿐이다

이것은 볼멘 투정이 아니라
진실을 이제사 알게 된것에 대한 아쉬움과
잊지 않기 위한 낙인이다
혹시나 내가 세상에서
영원히 잊혀지더라도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