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y/reView

몬스터 콜 A Monster Calls, 2016


이 영화를 단순한 치유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양가감정과 자기인정이라는 비교적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등장인물과 주어진 상황 또한 모두가 모호하며, 처음의 해석이 나중에는 완전히 달라져버리기도 한다. 이 리뷰는 개념의 정리와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조금 더 명확히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괴물이 처음 등장한 묘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 묘지는 코너의 악몽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장소이기도 한데, 다름아니라 이 꿈은 코너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의 현현이자 이야기가 도달하는 마지막 종착지이다. 괴물은 코너가 현실이 아닌 모든 것이 예정된 세계에서 불러 낸(Call) 해결법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장소,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12시 7분)에서 괴물은 나타난다.


괴물이 등장하는 장소와 시간의 변화, 그리고 코너와 괴물의 관계 진행 양상도 역시 의미가 있다. 처음 괴물은 이야기를 들려준 뒤 코너 역시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길 원하는 미지의 존재였고, 코너는 괴물이 적과 용을 물리쳐 주길 바랐고 이후에는 괴물을 엄마를 치료해줄 수 있는 일종의 구세주처럼 여겼다. 괴물은 쌍방소통을 원하고, 코너는 일방적인 요구만을 하고 있다. 괴물이 이야기의 끝에서 찾아와 끝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 이는 곧 자신의 믿음만을 이야기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 괴물은 자정 12시 7분이라는 제한적인 시간과, 묘지에서 코너의 집으로 온다는 고정적인 출현 조건과 방식을 갖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괴물은 정오 12시 7분, 또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나오며 코너의 집이 아닌 할머니 집과 학교 식당에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두 번째 이야기를 할 때 코너는 괴물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시계바늘을 돌려 직접 불렀고, 현실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았던 첫 등장과는 달리 코너가 괴물과 함께 꿈 속에서 행했던 집 파괴는 할머니 거실의 기물들을 부순다는 현실에서의 행동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괴물이 현실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코너의 상상은 현실에 서서히 스며들며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에서 괴물은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날 일,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동시간대에서 이야기하며 코너와 동화된다. 이 일련의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는 과정은 현실의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삶은 말로 쓰는 게 아니다. 삶은 행동으로 쓰는 거다. 네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네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중적인 코너의 감정이 합일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넌 고통이 끝나길 바랐다. 너 자신의 고통이지. 그건 아주 인간적인 바람이다." "진심은 아니었어." "아니지, 하지만 진심이기도 하다.").

엄마의 사망 시각과 동일한 괴물의 출현 시간이 동일한 것은 코너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바라기도 하는 시간이며 그래서 다가오지 않길 바라는 시간이다. 괴물이 그 시간에 나타나는 것은 느끼는 것에 솔직해져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그리고 괴물은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로써 코너에게 다가온다.


영화 내 등장하는 인물들은 처음엔 코너와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 작용 방식은 인물마다 다르다. 점점 악화되어가는 엄마의 병세, 외할머니의 개입으로 인한 엄마와의 분리, 아빠에게서는 일시적인 보호밖에 받지 못한다는 데에서 실망감을 느끼며, 해리는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코너와 유리된다.

인물들의 잘못(또는 잘못처럼 보이는 부분)은 그들의 잘못으로 두고, 그러나 코너 역시 건강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접근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학교 공부 대신 그림에 몰두하며 상상 속으로 도망가려 하고, 해리의 괴롭힘과 거실 파괴 등의 문제행동은 코너가 자신의 죄책감을 속죄하기 위해 택한 처벌 방식 중 하나였다. 혼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냐는 어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전까지도 이후로도 코너가 지속적으로 처벌받기를 원하면서 어떤 것도 충족되지 못해 계속 문제행동을 일으킨 것은 그가 진심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자 이불을 개고,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를 하는 자신을 만들어가며 모든 것이 괜찮다는 믿음을 자신 안에 쌓아두었다. 물론 이것도 코너 자체만의 문제라곤 할 수는 없다. 결국 코너를 한계점으로 몰아넣게 한 이런 연쇄적 상호작용은 어느 누구의 책임이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없게 된다. "믿음은 소중하다. 믿음의 대상은 항상 조심스럽게 골라야 하지.", "온전히 착한 사람도 없고, 순수한 악도 없다. 사람들은 그 사이에 있는 거다."라는 괴물의 말은 이것을 가리킨다.

시간이 지나며 코너와 인물간의 거리는 좁혀진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코너는 자신에게 머무를 수 없는 아빠를 아빠가 떠나기 직전에 이해한다. 해리는 코너가 왜 괴롭히길 바라는지 이해하고 그에게 무관심해지려 하며 코너는 주먹으로 응수한다. 엄마의 죽음이 가까워진 상황에서 진심을 생각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이야기하는 코너를 외할머니는 안아주며 코너와 자신의 깊은 유대를 이야기한다. 괴물은 위압적인 말과 행동으로 코너에게 진심, 네 번째 이야기를 말하길 요구한다.

그렇기에 어떠한 극적 사건 없이 코너를 마음 깊이 이해하는 엄마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필요한 만큼 화를 내도 돼. 아무도 너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할 수 없어. 외할머니도, 네 아빠도, 그 누구도. 뭔가를 부숴야 한다면, 부디 제대로 속 시원히 부숴라. 그리고 만약에 언젠가, 이때를 돌아보고 화를 냈던 것에 대해 후회가 들더라도, 엄마한테 너무 화가 나서 엄마랑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게 후회가 되더라도, 이걸 알아야 한다, 코너. 그래도 괜찮았다는 걸 말이야. 정말 괜찮았다는 걸. 엄마가 알았다는 걸. 엄마는 안다. 알겠니? 네가 아무 말 하지 않더라도, 엄마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아. 알겠지?"


엄마에게 진심을 말하고, 죽음을 받아들인 후 코너가 집에 돌아온 시간은 7시인데, 이 때 시침이 7에 있고 분침이 12에 있다. 상상과 현실의 위치 변환이자, 코너가 상상이 아닌 현실로 완전히 돌아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외할머니와 코너가 갖고 있는 엄마라는 유대는 외할머니가 엄마의 방 열쇠를 건네주며 더 부각된다. 엄마의 상실 후, 머무를 수 있는 곳에 대한 코너의 갈망을 알아 준 일종의 희생이기도 하다. 외할머니에게 모든 것이 고스란히 보존된 엄마의 방은 코너에게 엄마와도 같은 머무르고 싶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그림책 속 <킹 콩> 삽화에 이어 나타나는 거인이 들려줬던 이야기의 장면들은 현실(킹 콩)에 더해 마음의 아주 깊은 부분(괴물)까지 두 사람이 공유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부분에서 괴물의 정체에 대한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 우선 공상적 의미의 해석이 있다. 배우 리암 니슨은 작중 괴물의 성우와 모델링을 맡았는데 스치듯 지나가는 사진 속에서 외할아버지가 바로 리암 니슨으로 나온다. 또, 엄마의 임종 때 괴물과 엄마와 눈을 마주친다는 점에서 1.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괴물이 되어 엄마와 만난 적이 있다는 추측, 2.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괴물이라는 별개의 존재가 나타나 엄마와 만난 적 있다는 추측이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 밖의 연출과 개입이 영화 내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리암 니슨이 괴물이라는 추측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결국 남는 것은 2번인데 작중 코너에게는 이런 공상적인 해석이 타당할 수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추측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나는 괴물은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어른도 한 때 어린이였으며 의지하고 싶은 대상과 고민,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괴물과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같고, 괴물과 눈을 마주쳤다는 공통분모는 피가 이어진 사이의 유대를 부각하기 위한 극적 장치라고 보았다. 이 부분은 엄마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게 불필요하기도 하고 일부러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를 일컬을 때 "인생을 바꾼 영화"라는 수식어를 흔히 볼 수 있다. 대개 교훈이나 계몽의 의미를 가진 메시지를 담고 있는 탓이다. 그런 식의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가치에 대해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이전의 자신을 밟고 내딛을 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자신이나 현실을 환기하는 깨달음은, 후회나 부정 같은 일종의 성장통을 수반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부당한 강요나 종용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몬스터 콜>은 그런 류의 영화는 아니다. 전하는 것은 있지만, 다른 모습이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영화 초반, 코너는 엄마와 함께 <킹 콩>을 관람하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걸 싫어해. 무서워 해."라고 말한다. <몬스터 콜>은 누구나 갖고 있을, 이런 이해받지 못하는 모습 있는 그대로를 다정하게 안고 위로해주는 영화다.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모두 나 자신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10 / 10

'Silly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우석 / 냉장보관 (2018) Review  (1) 2018.05.23
뉴올 / Finder (2018) Review  (0) 2018.04.03
그래비티 Gravity, 2013  (0) 2018.02.17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2005  (0) 2018.02.16
Rhye / Blood (2018) Review  (0) 2018.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