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y/reView

캐롤 Carol, 2015

캐롤이 테레즈의 오른쪽 어깨를 쓸어내리자 테레즈는 캐롤의 손을 내려다본다. 뒤이어 리처드가 테레즈의 왼쪽 어깨를 쓰다듬고 테레즈도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눈은 캐롤을 찾아나서는 것 같다.


Rewind time. 둘의 첫 만남. 캐롤의 플러팅@백화점은 적당히 눈치챌 수 있을 법하면서도 '이게 나 혼자 착각하는 자의식 과잉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를 것 같은 오묘함과 짜릿함, 긴장을 잘 표현해줘서 마냥 좋았다.


이후의 만남에서, 캐롤은 테레즈의 성씨에 대해서 기원이 되는 조상에 대한 얘기까지는 궁금해하지 않고 독특하다 평하며 말을 자르지만, 그것은 무시가 아닌 캐롤이 백화점에서 기차세트를 주문하며 보였던 노골적인 플러팅의 연장이다. 어떤 말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대화를 한다는 그 자체를 만끽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리처드는 동성애에 대한 흔한 편견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물상이 어떤지를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 화면 캡쳐하면 바로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써도 될 것 같은 뻔한 구도들의 연속 때문에 안 그래도 짜증나 있는 상태여서 더 그런 뻔함에 질렸다. 아무튼 리처드도 테레즈의 말을 자르는 것은 캐롤과 마찬가지지만, 그것은 분명한 무시의 신호임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다. 리처드는 대화를 하는 것보다 자신이 어떤 말을 테레즈에게 하고 싶은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나는 즉흥적인 것을 처어저어얼하고 질리도록 싫어하고 기피하는데, 그래서 멀리 떠나자는 캐롤의 "Would U?"라는 말에 "Yes."라는 테레즈의 즉답이 그 자체로도 너무 신기했고 이후 그들의 행보 자체가 너무 놀라웠다. 무엇이 그런 즉흥적 긍정을 테레즈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런 낭만으로만 가득 찬 듯 보였던 미대륙 일주 도피를 추진할 수 있었던 에너지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해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언뜻 보기에 테레즈가 캐롤에게서 그런 선택을 내릴 만큼 캐롤이 너무 짧은 시간 속에서 충분히 자신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도 맞지만, 테레즈가 겪었던 남자들과의 대비 효과도 적지 않게 개입했다고 봤다. 가령 사진관에서 기습 키스를 시도하며 싫냐고 묻고, 테레즈의 '싫은 건 아닌데….'라는 말을 듣자 마자 '또 언제 오냐, 수요일에 와라.' 라고 단정적이고 일방적인 선언을 한 후배, +리처드. 직접적인 스킨십은 없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선물과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공간이어야 할 집으로의 상호 초대, 동시에 평소라면 개인적으로 경험했어야 할 것들을 의도했든 의도치 않든 공유하며 쌓게 되었던 래포 등 캐롤의 행동들이 자신이 겪고 있는 사람들과 상당히 대조적으로 테레즈에게 반영되었고, 그것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테레즈가 모든 것을 놓고 캐롤을 따라가기에는 충분할 만큼의 판단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결과적으론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처드의 불길한 예언(2주 후에 뵙겠습니다)이 맞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행복했다. 식당 가서 LP를 선물하고, 맞잡는 것이라기보다 단순한 접촉에 가까웠던 첫 손잡기라는 중요한 사건을 지나가는 장면 속에 흘리는 눈빛으로만 숨겨서 보낸 건 굉장히 감탄한 부분이었다. 파란 스웨터 좀 가져다 달라는 샤워중인 캐롤의 요청에 트렁크 뒤적거리다 옷 냄새 맡는 것은 굉장히 원초적이면서도 절제적인 애욕의 표현이라 좋았던 부분. 이런 식으로, 둘의 사랑은 당시엔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터부시되던 동성간의 사랑처럼, 은밀하면서 동시에 노골적이고 싶어한다.


앞서 리처드나 사진관 후배가 너무 뻔하다고 언급했었다. 그 둘 뿐만 아니라 하지는 물론이고 <캐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가 되게 집착적이거나 아무튼 어딘가 한 부분 이상이 이상하게 표현된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데, 자세히 살펴 보면 오히려 통상적인 남성의 연애방식을 잘 포착해냈다. 작중 남성들이 이상하게 표현되었다고 느낀 당신은 남성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도 자신의 사랑이 착각물, 순정물이라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불편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무튼, 게다가 하지는 그런 자신에게 빠져있기까지 한데 캐롤에게 집착 이상의 광기를 부리면서도 캐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캐롤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 모습은 그저 퀭한 눈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하지가 캐롤의 행방을 캐물으며 완력을 행사하다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끝까지 현관문을 밀치지 못했던 것 역시 자신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과 반성 때문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연민 때문이었을 거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후회하고 뉘우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조차도 자신의 감정만을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캐롤은 도피를 하면서도 하지에 대한 일말의 여지를 생각하고 있다. 불안함이 잔뜩 묻어있지만 그것은 두려움 등의 감정 때문이 아님은 알 수 있다. 비록 어떠한 대화도 없이 받자 마자 바로 끊어버리긴 하나, 수화기를 대고 있던 귀 쪽의 귀걸이를 떼고 있었다는 것은 그 시절의 전화예절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혹시 오래 통화하게 되진 않을까, 하고 매달려 있던 미련일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미련을 귀에 도로 붙이고 나와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행동하는 캐롤은 너무 불안하다. 그리고 불안은 실제가 된다.

자신의 전 연인을 테레즈에게 보내 2별을 대리 통보하고, 1방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그런 식의 무책임함은 이전까지 보여졌던 캐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데, 이유야 영화 진행 상 누구나 알게 될 수 있는 부분이고 중요한 것은 남겨진 테레즈에 대한 고통이다. 이별이라는 경험은 누구나 다들 겪어봤을 것이지만 돌아가는 길 도중 멈춰 서서 구토처럼 남김없이 쏟아내게 되는, 이제 갓 스물이 느끼는 고통은 얼마나 아플지 감히 누구라도 짐작할 수 없었을 부분이었을 것이다.


Fast Forward. 첫 장면으로 돌아와서 캐롤이 권하는 담배를 테레즈가 물리는 장면도 일부러 지나가는 대화 안에서 흘려보내는 것도 좋았다. 첫 만남에서 망설임 없이 권하는 담배를 집어 들었던 것과 대비되며 둘만이 알 수 있는 언어로 얘기하는 장면이다.

<캐롤>은 이런 식으로 정서나 상황을 대조 혹은 대칭적으로 연출하는 것이 영화 상의 중요한 특징이다. 앞서 말한 담배 받기-물리기 같이 쉽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세심하고 면밀히 들여다 봐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이건 내가 알아낸 것은 아니고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다 들은 것인데, 가령 영화 중반에 집으로 돌아온 캐롤이 시댁 식구들이 있는 식사 자리에서 굉장히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흡연하다 나오는 것 ↔ 최후반부 헤테로섹슈얼 대잔치에 간 테레즈가 적응하지 못하고 그들 사이를 헤메이다가 동류의 누군가와 나눈 기류가 트리거가 되어 밖으로 뛰쳐나가는 부분이 힘들게 알아낼 수 있는 대칭적 부분이면서 주인공 두 명의 성 지향성 확립을 잘 드러내주는 부분이라고. 캐롤의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말이 이런 영화 상의 특징을 가장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라고도. 곁가지로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연출에 대한 얘기도 적고 싶은데, 영화 중반 애비(아빠 아님)가 캐롤에게 테레즈와의 만남을 말리는 장면에서 애비가 혼잣말 하는 것처럼 카메라가 애비만을 포착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캐롤이 애비의 말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 120%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이런 숨겨진 요소와 대칭으로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이 더 견고한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