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y/reView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Swallowtail, 1996


엔타운

円都

돈의 도시

엔타운

円盜

돈 도둑



함께 일상을 공유하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뒤로 하고 병원을 나오자마자 험담을 시작하고 돈을 빼앗아가는 모습, 그리고 뭔가를 할 것 같았던 중요해 보였던 인물들이 초반 몇 분만에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은 사람을 붙잡고 울고 돈을 태우는 것이 정말 슬픈 것이 아닌 의식의 형태로만 남은 황량한 관습임을 알 수 있었다. 아주 허무하고 거친 그 장면이, 발음만 같은 엔타운간의 대립을 보여주는 서막으로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시합 전에 항상 키스해주곤 했지." 라는 아로의 말, 그리고 아게하가 뒤에 이어질 말을 외우고서 똑같이 따라하는 대화. 항상 하는 마술(근데 이거 찾아봤는데 나 말고는 아무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뜨고 있지만 어느 것도 바라보지 않는 눈으로 타이틀 매치 직전의 경기를 회상하는 그런 느낌의 장면 나열들이, 엔타운에 사는 엔타운들이 과거 속에 묻혀 사는 인간형이라고 넌지시 표현해주는 게 좋았고, 과거에의 집착이 생활밀착형이 되면 환경이나 대화, 소품들과 함께 하는 신체적/정서적 일상 자체가 정말 저렇게 될 것 같아서 꽤나 실제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예컨대 아로와 아게하에게 마술과 과거 회상은 항상 하는 것들이지만 서로에게 늘 새롭게 느껴지는데, 그것들의 주제의 공통점은 현실과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것들이다. 앞을 바라보고 있지만 앞을 바라보기 싫어서, 다른 세상을 보았던 때를 생각하며 지금도 다른 세상이기를 소극적으로 바라는 것. 그렇게만 이어지는 삶.


아로가 성 매수 남성에게 따따블펀치 날리는 장면에서 화면이 일시 정지되는데 이게 내가 본 게 잘못된 건지 영화 내의 의도적 연출인건지 모르겠다. 의도적이라고 치고, 그것 포함 남성이 창 밖으로 날아가는 장면이랑 차에 깔리는 게 마네킹인 거 너무 어색하고 티 나서 웃겼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시기다보니 단순한 기술 미달로 인한 한계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 직후에 나오는 장면 때문이다. 시체를 파묻는 장면에서, 어떻게 봐도 빛에 반사되는 것도 보이는 인공 재질의 끈인데 기생충이라고 놀라고 난리 치는 장면은 조금만 더 보면 결코 웃으며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전과 같은 유희적 연출로만 여기고 방심하게 만든 다음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제재의 등장임을 알려서 한 번 놀라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고, 이전의 어설픈 장면들이 이 반전을 위한 기술적 한계를 이용한 복선이었다면 두 번 놀라게 되는 부분일 것인데 과연 실제는 어떨지 궁금했다.


시체를 묻고 오는 길 누추한 트럭에서 부르는 귀하신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는 엔타운의 이질성을 잘 나타내 준 좋은 부분 중 하나였다. 잘 모르는 노래라서 반박자 늦게 따라하는 거나 모르는 부분은 입 다물고 있는 깨알 같은 디테일도 좋았고. 이후 수 차례 해당 노래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개썅마이웨이를 고상하게 부른 노래의 가사가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부분 ①이라고 보았다. 부분 ②는 슈퍼바이저가 되기를 자청한 사람의 모든 대사들. 하나만 짚는다면, "생긴 것 때문에 외국인 취급이지만 사실 난 여기서 나고 자랐단 말이야. 돌아갈 조국이 없어. 나서 죽을 때까지 다다미방이지."

뭐 이런 등장인물들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영화는 계속 엔타운의 이질성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환기하는데 그 뿌리부터가 그렇구나 하고 느낀 것은 그리코가 처음 말하고 량키가 한번 더 말하는 그리코 이름의 어원.

"그리코란 이름을 지어줬어. 내가 지어준 이름이지. 걘 늘 힘이 넘쳤지. 일본 카라멜인데, 알아? 이 나라 비즈니스맨은 다 이걸 빨면서 자랐어."


주제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 말고도 영화는 절제를 통한 영상미를 놓치지 않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아게하가 가게를 다시 사겠다며 가져온 돈을 정리할때 뒤에서 목 조를지 말지 고민하는 것. 손의 섬세한 움직임으로만 단호함에서 망설임으로 이어지는 감정선을 너무나 잘 표현해서 아찔할 정도로 좋았다. 량키를 맞출 게 분명한 총알의 행방도 굳이 보여주지 않는 점도 만족스러웠고.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 전반적으로 언어, 인종, 국적 등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을 세뇌시키듯 보여주고 엔타운이라는 동음이의어 작명이 그 혼돈을 결정적으로 관객에게도 전가시킨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하등의 불편함이나 헷갈림, 어려움이 없다. 갈등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그것도 어떤 식으로든 소통을 하면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식이 대화든 극단적 형태의 폭력이든 어쨌든 인물들은 끊임없이 일방적이지 않으려 하거나 그렇게 된다.


굳이 하나 집어낼 단점이라면 근미래적 세계관인데, 현실에 기반한 비현실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크게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설정이다. 평행세계의 일본임을 말하고 이질성을 대표하는 장치의 하나 같기는 한데 란과 바주카포녀는 전형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동시에 맥거핀이기도 해서 붕 뜨는 느낌이 너무 크고, 굉장히 좋았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관람 직후에 봐서 그런지 대비적으로 맥 빠지는 느낌도 조금 있어서 어떤 변호나 의도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매료되지는 않았던 부분. 어쩌면, 영화 바깥에서 나라는 한 명의 관객에게 다가온 이 이질성이, 영화가 대표하는 이질성을 말하는 가장 효과적인 요소로써 기능했는지도 모르겠다.


결말에서 등장인물들은 돈을 불에 태운다. 그 행동이 개인적으로도, 보편적으로도 현실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향유하고 있었던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의 형태를 불러 오리라는 것은 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초반 시체 위에 불타는 돈을 던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꽉 채운 무언가를 담고 있는 지폐 소각의식을 통해 그들이 다른 개념의 부를 축적시키고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돈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양복 사내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욕설과 함께 격한 반응을 터져 보이다가 자조하며 거드는 모습은 사뭇 짜릿하기까지 하다. 영화가 그렇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이 해당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었고 얼마나 얻었을지, 어떻게 살아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이상한 채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로, 거부된 채로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 어느 것도 서로에게는 피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확인했다. 그렇기에, 나는 엔타운들이 엔타운들인 채로 행복할 것임을 진심으로 믿는다.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