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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슈슈의 모든 것 All About Lily Chou Chou, 2001


영화는 유이치가 호시노와 그 무리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유이치가 얻어맞고 강제 자위하는 장면까지 나올 때는 엄청나게 치욕적일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 와중에 호시노가 입은 아노락 진짜 멋있다는 생각도.


아무 것도 모르니 장면도 어떻게 배치했는지 몰라서 초등학교 때는 이지메 당하고 쭈구리였던 유이치가 현실 도피의 목적으로 리리피리아에 아오네코라는 필명으로 가입하게 된 줄 알았다. 장물을 팔아 넘긴 가게에서 포스터를 얻고 음악을 들은 장면 이후에 리리피리아에 접속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고.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때는 우울했던 호시노와 만나 동질감을 느끼며 커가는 성장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얘기였다. 내가 사람 얼굴을 잘 인식 못해서 판단이 늦은 것도 있는데 심지어 후반부에 호시노가 블루캣 이메일이 적은 파란 사과를 들고 릴리 슈슈 공연장에 왔을 때조차도 호시노=블루캣임을 몰랐고, 쿠노나 츠다가 피리아인줄 알았다. 자살한 것도 쿠노가 가발 쓰고 죽은 줄 알았고…. 총체적 난국이다. 전체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유이치가 콜라 살 때 계속 지켜보던 여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 점에 대해 내 난독이 100% 원인인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모 사이트에서 서술된 바로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책으로 낸 것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되어 있고 '원작에서 생략된 부분이 많고 다른 부분도 많으므로 책을 참고해야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만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불친절함에서 호오가 많이 갈렸다'고 써 있는데 반쯤은 동의한다. 2차 창작과는 개념이 다르고 자신의 의도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니 비교하기보다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라는 하나의 아트폼 자체를 감상하기 위해선 '반드시' 봐야 한다고 본다. 아쉽게도 번역 정발된 것이 없는 것 같다.


재작년 전후해서 <간츠>를 필두로 한, 주연이 우수수 죽어나가는 아포칼립스 장르가 일본 만화계에서 우수수 쏟아져나왔는데 츠다가 죽고 쿠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얼핏 그런 만화들이 생각났지만, 이 영감이 큰 장면이 그런 장르의 전신이 됐다기보다는(어떤 작가 개인에게는 미미하게나마 영향이 있을 순 있었겠지만) 기대를 무너뜨리고 배신하는 사상같은 게 일본 정서 안에 있지 않나 싶었다. '와(和)'라는 태도가 문화로써 자리잡은 것처럼.



검도부 3학년들이 마지막 대회를 마치고 사진을 찍는 장면-누가 누구와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것으로 마음을 전달하려 하고, 마냥 활짝 웃는 천진하고 덜 자란 얼굴들. 그리고 교복을 입고 하는 학교 생활 그 자체가 나를 그 시절로 끌어당겼다. 간간히 첨가되는 낭만적인 장면들은 그 감정을 배가시킨다.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바는 단 하나도 없는데 릴리 슈슈라는 하나의 인물이 호시노, 유이치, 츠다, 쿠노 각자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그렇게 받은 영향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도 십대다운 감성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고,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수업 있는 날이네'하고 좋아하던 것처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그 때만의 감정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성인이 된 이후에 영화에 풀어낼 수 있었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역량에도 상당히 감탄했다.


하지만 더 감탄하고, 이 영화를 단순한 십대 낭만을 다룬 게 아닌 잔혹동화라고 얘기하고 싶은 이유는 선도 악도 아닌 등장인물들의 애매한 스탠스 때문이었다. 

나는 유이치의 울음과 숲속에서의 외로운 음악 감상에 특히 이입했고 선생님이나 부모가 개입하면 금세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지 못한 것도 이해했다. 중1이다. 공부를 잘 하는 같은 반 애나 싸움 잘 하는 애가 동경의 대상이고 멋져보인다. 사랑도 반이나 학년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배하는 동시에 종속되는 학교와 또래라는 내집단에서 부모나 선생은 꼰대로 이름붙여지고 여겨지는 타자일 뿐이다. '꼭 부모님에게 말해'라는 말만큼 자신을 세상과 유리시키는 말이 더 있었던가? 그 말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면서 쿠노를 호시노에게 보내는 상황에서라도.

그러나, 결국 유이치가 자신이 아닌 타자인 관객의 입장에서 최선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호시노는 그냥 빼도 박도 못하게 개자식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숲에서 릴리슈슈 듣다가 울부짖거나 오키나와에서 돈다발 던진거(자기가 훔친 건데…)에서 더 연민이 이는 게 있었다. 아직 이 감정의 원인을 특칭하진 못하겠다. 착한 조폭의 이미지 같은 걸 볼 때 드는 감정처럼 악행에 비해 대비적으로 보이는 모습 때문에 마음이 유약해진 건지, 갈등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이입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학교다닐 때 조찐따가 아니었다면 더 이해 가능한 부분이었을지?


그 외에 츠다는 강제적이지만 성매매에 종사하고 있고, 쿠노는 나대는 인물이고(내 가치판단이 아니라 영화 내에서 그렇게 비춰짐) 여러 점에서 선도 악도 아닌 그저 자신을 고수하고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관객들은 마냥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동정할 수 없고 감독은 때때로 비춰지는 낭만적인 장면을 철저한 현실 안에 박아넣음으로써 그들의 세계를 더 부각시킨다. 학생이라는 계급이 마냥 그 때가 좋았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 아니라는 것. 실제 삶은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감독은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관객을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릴리 슈슈라는 사상 안에 끌고 들어오고 있는데, 애매한 등장인물들이기 때문에 릴리 슈슈는 더 독립적이고 뚜렷하게 나타난다. 종내에는 나조차도 릴리 슈슈를 어떤 절대자처럼 여기게 되어서, 콘서트장에서 릴리 슈슈가 유이치에게 얼른 들어오라며 인도해주는 식으로 구원해줄 줄 알았다.


밤에 촬영된 장면들이 조명 비춘 게 너무 티나고 몰입을 저해하는 요소여서 방해된 것을 제외하면 영화 자체는 굉장히 좋았다. 특히 예상을 깨는 면이 많아서 더더욱 좋았다. 나는 영화의 가치를 주로 독창성으로 판단하는데 여러모로 당연해 보이는 인과를 비틀고 관객을 놀라게 하면서 결국은 '그렇구나, 그럴수도 있지.' 식으로 이해와 인정을 하게 만드는 점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가령 호시노가 불량배의 머리를 자르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일 때 다시 초등학교 때처럼 왕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쿠노는 살고 츠다는 죽은 것 등. 이런 것들은 언뜻 보면 좀 이상한데? 싶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장면에서 꼭 등장하는 감미로운 음악 속에서 생각하다 보면 츠다가 활기차게 웃고 '연처럼 날고 싶다' 고 말한 뒤에 바로 죽어버린 것은 10대 초반 여자아이인 '츠다'다웠다고 결국 여겨지게 만든다. 산다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그런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고 말이 안 되는 것 같더라도, 시간은 놀라움을 진정시키고 어떻게든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