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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Kingsman: The Secret Service, 2015

안타깝게도, 내가 이미 여러 미디어 장르들을 통해 알아 왔고 복습한 것처럼(싸이, 파-이-스-트-무-브-먼-트, 스크릴렉스, MA-1, 쏘로굿, 범람했던 재난영화들) <킹스맨> 역시 한국인의 문화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 영화였다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그들의 저능한 기대치때문에 덩달아 부푼 마음과 기대로 영화를 보았다가 실망하여 왓챠에 낮은 별점을 매긴 사람이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더 짜증나는 것은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것.



적당히 눈치챌 수 있는 복선(영화 초반 아서에게 융통성 없음을 지적하는 해리의 모습 등)과 노골적이지 않은 재미있는 암시, 그리고 패러디들(두유워너빌더스노우맨 노크, "마티니, 당연히 보드카가 아닌 진으로, 오픈되지 않은 베르무트 병을 바라보며 10초 정도 저어서.", 후반부의 샤이닝 패러디 등)이 수없이 산재해 있긴 하지만 그러한 특징을 지녔다고 해서 <킹스맨>을 단순히 B급 영화의 서재에 넣어선 안 된다. 그렇다고 B급 영화 이상으로 평하기에도 이 영화는 꽤나 골칫거리다. 큰 그림부터 시작하자. 배경, 소품, 연출등을 통해 고급스러움을 한껏 추구하지만 사실 이런 첩보물과 품격의 결합은 그렇게 생소하거나 창의적인 소재는 아니다(신사와 요원, 당장 떠오르는 영화가 있지 않은가). 요컨대 영화 내내 보여주는 '신사'의 이미지는 <킹스맨>이란 영화만의 아이덴티티가 아닐뿐더러(B급 무비의 태생상 그럴 수도 없고) 그러므로 그곳에서 영화의 본질을 찾으려 해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고품격'에 대한 환상 충족을 위해, 그렇게 영화를 보고나서 남는 건 괜한 망상에 젖어 어울리지도 않을 커틀러 앤 그로스 안경 매물 찾는 일과 스트레이트 팁을 구매하는 일밖에 없을테니까.


내가 생각한 <킹스맨>의 개성과 본질은 세 가지다. 독창적인 악역, 극단적이기까지 한 철저한 오락성의 개입, 미학적 영상. '발렌타인'은 사실 악역 캐릭터 그 자체로 봤을 때 다른 영화들과 분리해서 놓고 볼 수 있을만큼 개성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사실 영화 전반에 투영되는 클리셰 퍼즐의 한 조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발렌타인'을 이 영화의 삼위일체로 뽑은 까닭은 이런 첩보 영화들에서 이만큼 재밌고 인간적인 악역이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종보스면서 영화 초반부터 친히 전반적이고도 적극적인 스토리 개입을 하지 않나, 복장은 또 얼마나 유쾌한가(잘 나오지 않지만 시계조차 싸구려 카시오 제품이다. 중반부 단독으로 비춰주는 에그시의 고급 크로노그래프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지). 피를 잘 보지 못하고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을 꺼려하지만, 서로 죽이도록 사주하고 방조하는 건 '직접' 죽이는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태도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악역에 배치되도록 만든 사상인데, 극단적 환경주의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바보같은 니힐리즘적 태도는 사실 그 뿌리가 보편윤리적으로 선한 발상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관객을 그를 쉽게 나쁜 놈으로 취급하기 망설이게 만든다. 사실 어느 정도 동의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기묘한 싸이코같지만, 눈만 돌리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과 태도로 선과 악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흩어놓는다.


언뜻 지나치다고 느낄 만한 폭력과 신체훼손의 묘사에게까지 EDM 같은 걸 끼얹는다는 것 역시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의도한 것이 뻔하게 느껴지도록 그런 특정 장면만을 일부러 유쾌하게 연출한 다른 영화보다 <킹스맨>의 그것에 더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모든 것의 극단 때문이다. 패러디, 오락, 고급성 등 영화 내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영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판에 폭력과 오락의 극단이 코앞에서 충돌하는 장면을 지켜볼 때 관객은 비로소 영화의 추구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혹은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영화 내의 잔인한 묘사 자체를 현란한 음악에 정신이 홀려 이전까지의 삶을 지배하던 윤리적 편견에서 벗어나 잔인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다시 말해 폭력의 카타르시스에 솔직해지게 되는 시점에 이르게 된 것 자체가 어느 정도 <킹스맨>의 본질을 파악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것까지 모를 수 있을 관객을 위해, 친절하게도 <킹스맨>은 최후반부 노아의 방주에 탄 동물들의 머리가 폭죽처럼 산개하는 장면을 통해 노골적으로 자신의 뼈대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화려한 CG와 색감, 조명, 구도. 웨스 앤더슨만큼 강박적이지는 않지만 영화는 B급 영화임을 차치하고서라도 꽤나 세심하며 섬세하다. <킹스맨>을 빈약하게 지탱하는 '품격'이란 이미지를 보완하기 위해 일관성 있게 진행되는 영상이라는 느낌을 지우긴 어렵겠지만, 그런 삐딱함을 장착했어도 영상의 어느 부분에서는 누구라도 눈을 뗄 수 없을 것임을 공언할 수 있다.


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