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epy

마지막 글

이 곳에 여러 번 글을 올리려다 말았다. 썼다 지우기를 여러 번. 매번, 글을 쓰는 도중, 혹은 다 쓴 후 확인 버튼을 누를 때, 무엇이 나를 가로 막았던 것일까. 두 가지 요인 정도가 가장 크다. 하나는 국적을 버리고, 더이상 이 나라의 그 어떤 상황이나 흐름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다는 결심. 그리고 또 하나는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 십여년이 넘도록 소통하면서 결론적으로 깨달은, 인터넷을 통한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혹은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것. 이런 생각이 나의 글이 결코 저장되지 않은 문서로 남아 있다 사라지게 한 요인이었다. 오늘은, 술을 아주 조금 했지만 취한다는 합리화 같은 것에 의지에 한 번 써보려 한다. 



   들어가기에 앞서, 제 잘난 것 드러내놓고 싶어하는 놈아, 그래 너 잘났다, 라고 말할 사람들에게는, 웃기지 말고, 계속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삐딱선 그만 타라고 말해 주고 싶다. 내가 짧다면 짧은 30여년을 살다 보니, 그런 말 하는 놈들일수록 남들 잘 무시하더라. 지금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자, 시골서 흙투성이 옷을 입고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람대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어 대할 수 있는가? 내가 시골서 그렇게 일하다 만난 이들의 비루함은 어설픈 교양이나 소유물 따위로 감추어지지 않더라. 



   자유.
   최선을 다하자. 
   잘 하자. 
   책을 읽자. 
   신념을 가지자.



    한국에는 노예가 너무 많다. 자발적 노예들. 자유를 달라고 외치지만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무서워 결국 복종하더라. 나는 말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테니 나에게 자유를 달라고. 대답하기를, 넌 아직 어리다, 네 잘못이 아닌데 네가 책임을 져야 할 일도 생기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삶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은, 내가 한 결정에 대해선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 결정을 함으로써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을 감수하겠으니, 자유를 달라고. 그래서 나는 그 누구도 나의 원망 속에 놓지 않으며,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운다. 중고등학교 때 어느 과목을 못 했던 것에 대한 과목 선생님에 대한 원망에서부터, 진로에 대한 부모님/선배들의 의견, 모든 것을, 그것은 단지 ‘참고사항’일 뿐 결국 결정한 것은 나였고, 따라서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것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싸워 얻어 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항상 동시에 가졌었고,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기에 항상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곰곰히 사람들을 살펴 본 결과, 합리화가 횡행하더라. 이래서 안된다, 저래서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솔직해 지자. 하고 싶은데 안 된다면 어디까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뭐든 단박에 100% 되는 것은 없고, 80%까지 만들어 놔도 그럭저럭 굴러 가고, 그것이 나중에 90%가 되고, 95%가 되더라. 아주아주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자. 왜냐 하면, 노력은 배반하지 않고, 고생을 값지게 만드는 것은 성공의 회상 속에 고생이 있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난 고3 때도 모내기 했다. 과외도, 학원도 안 다녔다. 대학 때도, 좌우지간 살면서 학원을 다닌 적은 딱 한 번 영어회화학원, 그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날 요량으로 다닌 것밖에 없다. 대학 때는 성적을 버리고 내가 원하는 공부 방법을 택했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범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처럼 성적에 연연해 하지 않는 이 없으니까. 숙제를 해놓고도 귀찮아서 내지 않은 적도 있고, 성적에 연연하지 않으니 컨닝이나 숙제를 베끼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잠자다 교무실에 수차례 끌려 갔고, 수업 시간에 침 흘리며 자는 모습이 내 이미지이다. 하지만 공부를 할 때는 정말 집중해서, 후회없이 했다. 그리고, 조금은 잘했다. 



   우리는 말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부분만 맞는 말이다. 잘 해야 한다. 왜냐 하면, 최선은 누구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주위에는 술먹고 꽐라 돼서 시험에 늦고 학고 맞은 놈, 뭐 그런 놈들밖에 없더라? 시선이 딱 고 주위밖에 안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전교 1등했다고 제가 제일 잘난 줄 아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요즘 수능에서 전부 2등급이라고 아주 공부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내 주위에 보이는 사람이 전부가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최선을 다해서 내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 중에 조금 잘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어슬렁어슬렁 하지 않는 이상, 내가 부딪혀야 할 이들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그 중에서 잘 하는 사람들이다. 혹자는, 어슬렁어슬렁 하는데도 잘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라고 한다. 동의한다. 많이 본다. 하지만 소수다. 그리고, 잘 하면서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열심히만 할 것인가? 잘 해야 한다.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선 배움이 있어야 한다. 배움은 무엇으로부터 얻는가? 강의? 좋다. TED 같은 거. 하지만 내가 볼 때, 얄팍한 몇 개의 지식이나 감동적인 몇 가지 일화를 보고 듣고 읽는 것보다, 고전을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어야 한다. 굳이 고전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지만 소설이나 자기개발류 등의 시시껄렁한 책에 국한 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10권을 읽을 동안 차라리 베이컨을 한 번 읽어 봐라. 방학 동안 인문사회교양철학 10권을 읽으면 갑자기 동기들이 어려 보인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다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잘 소화시키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같은 책을 하루만에 읽는 사람은 그렇게 100권을 읽어도 쓰잘데기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뭔 말인지 궁금하면 저 책을 읽어 봐라. 책 많이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책 많이 읽는 이들은 마치 그것을 자랑인양 떠벌리고 다닌다는 사람은 확률적으로 책을 적게 읽거나 안 읽는 이들이 많더라. 뭘 하든 세상에는 손가락질 받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자신의 게으름의 핑계거리로 삼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그냥 난 게을러서, 귀찮아서 책 읽기 싫다고, 공부하기 싫다고, 노력하기 싫다고 해라. 꼭 에둘러 말하더라. 왜 그럴까? 



   신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을 일정한 궤도 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는 버팀목이다. 자신의 신념에 자부심이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부끄럽지 않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보잘 것 없고 사람들에게 순진하다거나, 세상 물정 모른다거나, 속물이라거나, 편협하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당당해 질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신념이 없다보니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 가치관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 있고, 그러한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에둘러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난 인생에서 돈이 최고야. 부모자식 다 팔아먹어도 내 손에 돈만 많으면 장땡이지”,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건물 월세나 받아 먹으면서 띵가띵가 살아 가고 싶어,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념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 신념이 없고, 저러한 생각에 부끄러움이 있으니 대놓고 말은 못하고 이리저리 빙빙 둘러 얘기하지만 결국 속내는 저것인 것이다.
   신념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적당히 삶을 유지시켜 줄 수 있으면 된다. 그러한 것이 없으면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살아 오면서 누구한테 못된 짓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내 인생은 불행하지, 라는 질문을 할 처지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카뮈의 전락처럼, 시나브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순간 내 인생이 이모양 이꼴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은, 그냥 그때그때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옳다 믿으며 합리화에 빠져 왔다갔다 갈팡질팡 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삶은 아무리 빨빨대고 이리뛰고 저리 뛰어 봤자 결국 그 자리다. 브라운 운동이란 말이다. 목표가 있고, 신념이 있으면, 가끔은 실패하고, 가끔은 후퇴하더라도 결국 전체적인 방향성은 그 신념이요 목적지는 그 목표 근처가 될 수 있다. 목표란 적어도 비슷하게 되기 위해서라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념을 가졌다면, 언제라도 그것을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자신감을 갖자. 왜냐 하면 신념이란 언제나 아직 더 좋은 것을 찾지 못해 임시적으로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끝.